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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는 <유리망치>로 낯이 익습니다. 여러 장르를 섭렵한다는데 이번에는 미스터리가 조금 가미된 SF입니다.)
그다지 특별하지 않아 보이는 한 소녀, 사키와 그녀의 친구들이 천 년 후의 세계에서 겪는 성장과 모험의 이야기라고 <신세계에서>의 줄거리를 요약한다면 그건 정말 너무한 일이죠. 하지만 그런 이야기의 축이 없었어도 저 같은 독자들이 두 권의 두꺼운 책을 밤새 손에서 떼지 못했을까 하는 건 좀 의문입니다. 참신한 설정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천 년 후의 평화롭지만 불안한 현실, 엄격히 통제되는 과거, 그리고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는 미래, 주력, 악귀와 업마, 요괴쥐, 유사미노시로…… 사실 이런 것들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독자의 관심을 끝까지 붙잡는 것은 사키라는 소녀가 이들 속에서 어른이 되어 가는, 다시 말하자면 그녀가 (독자와 함께) 세계의 진실을 이해해 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세계의 진실 중 몇 가지는 천 년 전에 살고 있는 저에게도 꽤 공감이 됩니다.
학교
학교는 아이들의 능력을 평가하고 사회에 위협이 될 수 있거나 낙오된 아이들을 도태시킵니다. 그들은 남은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도 지워지지요. 합격한 아이들은 강력한 세뇌와 암시에 의해 체제에 순응하도록, 현실에 의문을 갖지 않도록 길들여집니다. 그러나 이런 걸러냄의 과정을 뚫고 기적적인 확률로 특별한 아이들이 나타나 세상을 놀라게 하지요. 우리는 그들을…… 저는 지금 <신세계에서>의 독후감을 쓰다가 어제 치러진 일제고사를 거부한 소수의 학생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천 년 후의 신세계에서도 학교는 이런 학생들을 ‘처분’하기 위한 수단을 고심하고 있더군요. ‘악귀’나 ‘업마’가 되어 세상을 파괴하는 것을 미리 막아야 하니까요. 악귀는 사이코패스의 다른 이름인 듯하지만, 업마는 무엇으로 이해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 삼십 년쯤 전이었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운동권’이 가장 가까운 의미를 가졌을 텐데, 지금은…… 뭐,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인간
신세계에서 초능력(주력)을 구사하는 인간은 콜로니를 이루어 사는 요괴쥐들을 여러 가지 작업에 부립니다. 별별 변이생물들이 다 있으니 인간과 말이 통하는 요괴쥐도 놀랍지는 않습니다. 대략 삼천년 전부터 ‘말하는 도구’로 노예를 다뤄온 인간들인데다 부락민의 전통이 있었던 일본이거든요. (우리 나라라고 다를 것도 없습니다.) 역사를 봐도 두 발로 걷고 말을 하고 민주주의를 외친다고 쉽게 인간이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주인공 사키는 누구보다 요괴쥐와 가까웠지만 – 목숨을 위협받은 만큼이나 덕분에 목숨을 건진 적도 많았죠 – 그 보답은 지극히 개인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인간과 짐승의 경계는 여전히 분명하니까요. 얼마 남지도 않은 인간들이 문명과 자유를 포기하면서까지 지키려고 하는 공동체는 그런 의미에서 내부로부터의 경계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깥 이류(異類)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주력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을 경계에 둘러쳐진 팔정표식처럼 말입니다.
희망
책을 읽은 후 제가 느끼는 ‘신세계’의 인상은 이 글의 제목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동시대의, 미래학자도 아닌 소설가가 그려낸 미래, 그것도 천 년 후의 세계에서 ‘예측’을 기대해선 안되지요. 그러나 우리는 역사가 어떤 면에서는 지루할 정도로 반복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에서 천 년 동안 변한 것들 – 초능력, 새로운 존재들 – 보다는 천 년 정도의 시간으로는 변하지 않을 거라고 작가가 생각한 것들에 관심을 둡니다. 주력을 가진 인간을 둘러싼 불신과 공포, 복수, 전쟁, 세대간의 갈등과 이해,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질투, 희생과 헌신…… 이렇게 나열하자니 참 진부합니다만 이런 것들을 빼놓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엮어내기는 어려울 겁니다.
성인이 된 사키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이 맞물려 만들어내는 자신의 슬픈 이야기를 소설의 형식으로 남깁니다. 그녀가 신세계에서 (from the new world) 다음 세대를 위해 남기는 메시지 가운데 저는 인간만이 가져왔던 변치 않는, 그러나 근거 없는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이 세계를 더 좋게 바꿀 수 있다는 아주 오래된 믿음입니다. 인간은 언제까지 이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요?
재미있는, 읽기 편한 책입니다. 소년 소녀들과 함께 신세계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가는 모험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모험의 끝에는 언제나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폐허가 된 도쿄 지하에서의 마지막 모험은 RPG 게임마냥 흥미진진하지요.
그러나 읽고 나면 한동안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수만 년 동안 본질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은 인간이 어느 날 갑자기 초능력을 가질 거라 기대하지는 않지만, 인간들 중 소수는 이미 그 비슷한 힘을 충분히 남용하고 있는 현실이 더욱 답답해집니다.
지난 달에 일본 미스터리 문학 즐기기 카페에서 출간 이벤트를 열었고, 고맙게도 당첨되어 책을 얻었습니다. <내가 꿈꾸는 천 년 후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덧글로 달아서 참여하는 방식이었는데, 제 덧글을 부끄럽지만 여기 옮겨 두겠습니다. 그 때 저는 책의 내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과거 천 년이란 시간동안 인간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돌이켜 보면, 그리고 이 좁은 지구를 생각해 보면 저의 꿈은 몽상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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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m Lehrer:
"언제, 그리고 왜 경제학자가 되기로 처음 마음먹었습니까?"
Paul Krugman:
"좀 곤란한 질문이군요.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SF를 읽는지는 모르지만, 아이작 아시모프 Isaac Asimov가 쓴 아주 오래된 SF 시리즈 – 파운데이션 – 에서는 진정한 변동을 이해하는 사회과학자들이 문명을 구합니다. 나도 그런 일을 하고 싶었으나 그런 학문은 존재하지 않지요. 그러나 경제학이 거기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해서 십대였던 나는 경제학을 공부했습니다."
폴 크루그먼, 왕년의 역사심리학자
크루그먼은 해리 셀던 Hari Seldon 같은 역사심리학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파운데이션 시리즈에서 셀던은 은하제국의 몰락을 예측하고, 문명이 야만으로 퇴보한 기간을 천년으로 줄이기 위해 동료들과 노력합니다.
아시모프는 소설에서 역사심리학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역사심리학 PSYCHOHISTORY– Gaal Dornick은 수학적 개념을 쓰지 않고, 역사심리학을 고정된 사회적, 경제적 자극에 대한 인간 집합체의 반응을 다루는 수학의 분야로 정의했다...
... 이 모든 정의들에 함축된 것은 인간 집합체는 통계적으로 처리되기에 충분히 크다는 가정이다. 이에 필요한 크기는 셀던의 첫번째 정리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더 필요한 가정은 그것의 반응이 완전히 무작위적이기 위해 인간 집합체가 역사심리학적 분석을 몰라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타당한 역사심리학의 기초는 셀던의 연구에 기반한다. 사회적, 경제적 동력에 부합하는 속성을 나타내는 함수들은...- 은하대백과사전 ENCYCLOPEDIA GALACTICA
인용된 인터뷰는 2008년 10월13일자 Newshour with Jim Lehrer에서 가져왔습니다.
[albook|small-gif|right|8974580853|width=100]파운데이션 1권이 집에 있었는데 이사하면서 버렸나봐요.
과학재단의 '노벨상 기반 조사 설문' 소식과 SF 잡지 판타스틱의 11월호 휴간 소식을 함께 접하고, 묘한 기분이 들어 이 글을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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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층 더 새롭고 보기 편해진 그의 신작과 만난다!!"인데, 여기서 '보기 편해진' 매우 중요하다. 어떤 독자는 BLAME!의 난해함이 후속편(프리퀄?)인 <NOISE>로 대부분 해소되었다고도 하지만 내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기에, 바이오메가의 '친절한' 서술 방식은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평범한 독자에게 고마울 뿐이다.
거대한 구조물과 기괴한 생명체의 묘사는 여전히 압도적이다. BLAME!과 다른 점이라면 아직까진 '하늘'이 보인다는 사실 정도? 폭주하는 오염된 세상에서 주인공의 모험은 BLAME!의 연장선 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몇 가지 사소한 특징:
1.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의 등장 (특히 3권 표지!) - BLAME!에는 시보 주임 말고 그런 존재가 거의 없었던 걸로 기억.
2. 가끔씩 허무하게 처리되는(죽어버리는) 적 - 잔뜩 힘주고 나타나서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허탈한 경우들이... 디자인이 아깝지도 않나.
3. 유머 코드 - 예: "그냥 벌꿀은 별로라..."
그리고 전작만큼은 아니지만 화려하게 난무하는 설정에 맞춰 역시 이번에도 용어 사전이 등장했다. 일본어 위키를 Ratatosk님이 번역했는데, 몇 번을 읽었지만 빠뜨리기 쉬운 부분들을 채워넣고 복습하기에 좋다. 대부분 스포일러일 수밖에 없기도 하니까.
Ratatosk's Tree - 바이오메가 위키번역
PS. 작가의 단편 <아바라 Abara> 상하권도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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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지 않나요? 몇 주 전 이 작가의 작품들이 새롭게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사이버리아드>를 지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어서 대표작인 <솔라리스>도 나왔더라구요. 오멜라스에서 정성들여 만든 책(‘초판 한정 양장본’)인지라 턱없이 비싼 값에도 불평할 수 없었답니다. 그리고 오늘, 소설의 맨 뒷장부터 펼쳤죠. 유명한 번역자님의 손을 거친 그 구절을 다시 만나려고요.
‘놀랄 만한 (경이로운?) 기적의 시대’가 ‘잔혹한 기적의 시대’로 변해버렸습니다. 번역 원본인 영어판에는 ‘cruel miracle’이라고 적혀 있나 봅니다. 알아보니 1992년의 번역 원본은 러시아어판을 번역한 일어판이었다는군요. 아, 스타니스와프 렘은 ‘폴란드’ 작가입니다. 어쨌든 제대로 된 이 번역본으로 인해 철없는 대학생이 맘대로 상상하고 십수년간 간직해왔던 그 멋있는 문장의 의미는 오해 혹은 비약이었을 가능성이 커졌다고나 할까요.
내가 가진 청담사판 책 바닥에 찍힌 도장의 숫자들을 보면, 이 책을 산 건 1993년 12월31일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이제는 색이 바랜 옛날 책이지만 이사할 때마다 버리지 않고 챙기면서 여러 번 읽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소설을 잘 이해한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오해나 안하면 다행이지요. 한편으로 위안도 삼아봅니다. <솔라리스>를 폴란드어로 읽을 독자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냐고, 영어판이든 일어판이든 영어-한국어판이든 러일한판이든 그게 그거 아니냐고 말입니다.
작품의 주제는 널리 알려져 있고 작가 역시 솔직히 얘기했더군요. “나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인간의 개념이나 이미지나 사고로 환원될 수 없는 것과 인간이 조우했을 때의 상황을 묘사하고 싶었을 뿐이다.” 다시 읽다보니 번역된 외국어 문학을 감상하는 내 처지 같기도 하고, 요즘같이 누군가/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어려운 시대에 대한 예언으로 읽히기도 하니 나의 오독은 부끄러움을 모르나 봅니다.
여담이지만, 타르코프스키의 동명 영화는 보다가 잠들었습니다.
(오래 전에 쓴 글, "SF를 읽고싶다."가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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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눈을 붙이기 전에 소설책을 꺼내들었다.
어슐러 K. 르귄, <바람의 열두 방향>
뒤에서 두번째 실린 단편이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다.*
이 이야기는 읽을 때마다 강한 인상을 남긴다.
축제와 온갖 즐거움으로 가득한 행복의 도시 오멜라스**. 그 도시의 지하실에 갇혀 있는 한 아이. 모든 사람들이 그 아이의 존재를 안다.
그러나 그들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중략) 그것이 바로 계약인 것이다.
오멜라스의 행복과 아름다움을 이 아이와 맞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향한 부당한 행위에 가슴 아파하면서 흘리던 눈물은 현실의 끔찍한 정의를 알아차리고 이를 받아들이면서 메말라 간다. 하지만 오멜라스 사람들의 눈물, 분노, 자비를 베풀려는 시도 그리고 자신들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태도야말로 오멜라스 사람들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진정한 근원이리라.
그러나 이 아이를 본 어떤 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시를 떠난다.
성인이든 청소년이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상관없이 그 사람들은 모두 혼자서 간다.
어디로 가는 걸까? 상상하기 어렵고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곳이다.
그러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알고 있는 듯하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조금 현실적으로, 조금 비관적으로 생각해 보자.
싸고 맛있는 미국산 소고기를 먹고 싶은, 팔고 싶은 사람도 있다.
일몰 후 불법 집회는 공권력으로 엄중 대응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
한나라당이 과반을 차지한 총선이 치뤄진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았다. 청계광장에 수 만명이 모여도 대운하와 재개발을 지지했던 국민들의 선택은 다음 투표까지 변하지 않는다. 한나라당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촛불을 들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부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몇 배의 경찰력과 보수 언론의 왜곡("좌파 세력의 반정부 폭력 시위...")으로 간단히 덮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모인다.
어떤 집에는 현수막이 내걸리고,
어떤 동호회는 신문에 광고를 낸다.
어떤 카메라는 현장을 중계하고,
어떤 시민들은 웃으면서 당당히 연행된다.
배후 세력을 아무리 찾아본들 헛수고리라. 가야할 길을 아는 사람들은 혼자서 가는 법이니까.
주)
* 이 책에 실린 마지막 단편의 제목은 여기서 얘기하지 말자. 작가 왈, "이 이야기는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 새로운 SF 전문 출판 브랜드의 이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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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가 오락가락... 가을이 올까요?
가장 최근, 늦여름을 보내며 읽은 책들입니다(순서대로).
브루투스의 심장, 히가시노 게이고
재밌어요. 비열한 인물들이 엮어내는 이야기가 더없이 흥미진진. 악당 주인공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읽고 난 뒤의 느낌으로 시 한 편 적어봤어요. 시이저를 찌른 '배신자' 브루투스를 생각하며.
그게 사람이든 물건이든 로봇이든.
왜냐면 예측불가능한 브루투스의 심장이 뛰고 있거든.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 오츠이치
게시판에서 극찬과 더불어 반대 의견도 만만찮게 보았지만 여름에 어울리는, 매력적인 제목 탓에 구입.
같은 제목의 소설과 '유코'라는 두 개의 중편으로 이루어졌는데,
좋은 점: 미스터리와 공포에 긴장감을 더하는 비현실적이고 담담한 묘사
아쉬운 점: 무섭고 재미난 (짤막한) 이야기 두 편, 단지 그것 뿐.
'이야기'와 '소설'의 중간쯤에 자리잡은 이런 작품들은 신선함이 생명이라지만, 전통적인 소설 독자인 내게는 그것만으로는 부족.
나폴리 특급 살인, 랜달 개릿
다아시 경 시리즈의 아쉬운 마지막.
중력의 문제 - 시리즈 첫 작품 '두 눈은 보았다'를 연상시키는, 조금은 전형적인 밀실살인사건. CSI 한 편을 보는 듯. 유물론에 대한 언급이 인상적.
비터 엔드 - 마스터 숀이 주인공으로 말려든 한 편의 희극.
입스위치의 비밀 Ipswich Phial - 폴란드 미녀 첩보원이 등장하는... 아주 대놓고 007. 다아시 경, 당신도 미녀 앞에선 위험해.
열여섯 개의 열쇠 - 보물찾기 퍼즐을 풀다보니, 사건은 뭐였지?
나폴리 특급 살인 -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오마쥬이긴 한데, 완전히 '뒤집힌' 구조라고나 할까. 변장한 채 열차에 올라탄 다아시와 숀이 마주친 살인사건. 승객들은 모두 거짓말쟁이. 지체를 허락하지 않는 그들의 임무. 시리즈는 끝났어도 그들의 활약과 함께 영불제국이 오랫동안 번영하길 기원하며... 안녕.
스나크 사냥, 미야베 미유키
일단 보너스로 얻은 루이스 캐롤의 "스나크 사냥"에서 한 구절:
하지만 들떠 있는 조카야, 그날을 조심하여라.
혹시 네가 잡은 스나크가 부점Boojum이라면! 그러면
너는 조용히 그리고 갑자기 사라져서
다시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사실 몇 시간 전에 다 읽어서 아직 머리 속이 복잡하거든요. 줄거리는 (작가의 전작에 비해서는) 간단합니다. 한 남자가 총을 훔쳐 흉악무도한 놈들에게 달려가는 거죠. 거기다가 미야베 미유키 식으로 살이 붙습니다. 그 남자의 과거와 현재, 그 총의 주인의 과거와 현재, 그 흉악한 놈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총 주인의 주변인들, 그 남자의 동료들, 그 남자가 도중에 만나는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 (헉헉헉;)
어쨌든 주인공은 제목처럼 사냥을 떠난 겁니다. 사냥감이 스나크인지 부점인지 모른 채로. 그러나 계획은 배의 돛대와 키가 얽힌 것처럼 '스나크되어' 버리죠.
1992년 작품이라 휴대폰이 빠진 추격은 왠지 어색하네요. 그래도 결혼식장부터 병원 앞까지, 하룻밤 내내 긴장감이 풀리는 순간이 없어요. 후기 격인 덧붙이는 이야기를 읽고 나서도 과연 이게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들만큼. 그리고 뭔가 답답한 느낌이 남는군요. 사냥해버리고 싶은 그런 사람들과 같은 세상에서 살면서, 나 자신이 스나크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아니, 원래부터 사람들은 모두 그런 괴물들은 아닌지.
짜증스런 여름이 너무 길었어요. 올해 여름은 어느 해보다 많은 (추리) 소설들과 함께 했군요. 가을에는 "보노보노"를 다시 펼쳐 볼까요. 순수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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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만화가게에서 빌려 봤던 즐거운 모험의 기억이 아직도 두근거린다.
동대문 총판 골목을 어슬렁거리던 대학시절, 몇 년간의 직장생활, 그리고 대학원까지, 내 성인의 시간은 이사할 때마다 골칫거리가 되는 만화책과 함께였다.
방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백권의 만화... 버리고 잃어버린 책들까지 모두 헤아리면 천 권, 이백 종은 충분히 넘겠다. 그만큼 읽었으면 이제 뭔가 밖으로 나올만한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만 부끄럽게 공개하던 서가에 바람을 불러오고 싶다.
90% 이상은 번역된 일본 만화다. 내 취향이 그렇다. 80% 이상이 비현실적인 배경의 얘기다. 내가 좋아하는 SF 만화란 현실과는 이중으로 격리된 세상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거기서 얘기되는 과장된 현실에 상처받고, 감동한다. "Blame!"의 구조물은 도시의 어지러운 거리, "총몽"의 자렘은 지배계급에 대한 동경, "프라네테스"의 목성 탐사선은 세상과 타협한 우리의 꿈이다. 내가 사는 곳은 "카페알파"의 세상처럼 저물어가는 듯 잔잔하기도 하다가, "에덴"의 그것처럼 냉정하고 잔인하기도 하다.
누군가 얘기했듯이, 그런 것은 상상의 문제이다. 하지만 백지 위의 상상은 아니다. '놀라운 상상'은 더할 나위 없이 숨막히는 현실의 가장 뾰족한 그 곳에서 시작한다. 현재와 과거에 대한 알레고리는 무조건 손가락질 받을 것이 아니다. 설사 지금 우리 곁의 인물과 사건이라 해도, 상상이 되고 만화로 그려질 수 있다. 그러나 판에 박힌 모든 것은 패러디의 즐거움은 줄지언정, 새로운 길을 만들고 목표를 그려줄 수는 없다. 좋은 만화는 언제나 무엇인가 이야기한다. 작가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인물들이, 배경이, 예상치 못했던 사건의 전개가, 나를 깨운다.
대체 이 세상에서 만화책이라도 읽지 않고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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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회관 SF - 직지 프로젝트를 통해 작년 이맘때 나의 옛 기억을 되살려주던 이 책들을 나는 초등학교 시절 친척집에서 처음 접했다. 어찌나 부럽던지. 아시모프의 로봇 시리즈 I, Robot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다시 보니 아직 안읽어본 것들이 꽤 있다.
그리고 초등학교 4, 5학년 때였던가, 여름방학 독후감용 SF 소설 중에 항해사 랜슬롯 비그스 Biggs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우주 코미디 활극들이 기억난다. 개학하고서 각자 읽은 책들을 모두 도서실에 기증한 탓에 나는 그 해 가을을 방과후 도서실에서 혼자 킥킥거리며 보냈다. 노란색 하드커버의 그 책들... 인터넷 덕분에 작가와 출판년도는 알아냈지만, 이제 우리 나라에서는 아무도 일등항해사 비그스를 기억하지 못하나보다.
중고등학교는 훌쩍 뛰어넘어,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SF라면 그리폰 북스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로저 젤라즈니, 어슐러 르귄, 그리고 영원한 전쟁의 조 홀드먼... 정말 맘에 드는 작가와 작품들이 많이 있었다.
구하기 진짜 힘들었던 커트 보네거트 Jr.의 작품들도 빼놓을 수는 없다. 타이탄의 사이렌에서 시작하여 제5도살장, 갈라파고스까지, 이것들은 대체 서점의 어느 구석에서 찾아야하는 건지...
그러나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가져다 준 작품이라면, 나는 솔라리스와 치료탑, 치료탑 혹성을 들겠다. 솔라리스야 물론 시공사에서 새로 번역되어 나왔지만 나는 청담사 판을 읽었기에... 이런 표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놀랄 만한 기적의 시대는 영원히 과거의 것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을 아직도 굳게 믿고 있다."
미지의 행성 솔라리스처럼, 이 소설은 독자의 마음 상태와 형편에 따라 제각각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아니, 그럴 것이다. 나의 마음을 아무리 확장시킨들 타인의 마음은 그 안에 없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에 겐자부로의 치료탑과 치료탑 혹성을 떠올려본다. 둘은 한 권의 책으로 나왔고, 내용이 이어지므로 묶어서 생각하면 된다. 나는 이 SF답지 않은 SF를 통해 정말 많은 것을 생각했다. 다 얘기하자면 나름의 개똥철학 주저리가 될 것 같고, 사실은 귀찮아 그만 두련다. 그나저나 고려원 출판사는 왜 망해버린거야.
바쁨과 게으름 탓에 내 인생에서 가장 '읽는' 책이 부족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조만간 처가에서 마련해주신 책장이 오면 기숙사랑 베란다 박스에 있는 책들을 꺼내 잘 정리해 보련다. 오랫만에 보는 SF가 있으면 그날 밤은 한번 새도 좋을 것 같다. 그 전에 책에 곰팡이가 슬면 안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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