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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해당되는 글 5건
2008. 5. 28. 02:08
[albook|small|right|8952737911|width=100]며칠째 밤마다 인터넷으로 현장 소식을 보느라 잠을 설친다.
오늘은 눈을 붙이기 전에 소설책을 꺼내들었다.

어슐러 K. 르귄, <바람의 열두 방향>
뒤에서 두번째 실린 단편이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다.*
이 이야기는 읽을 때마다 강한 인상을 남긴다.
축제와 온갖 즐거움으로 가득한 행복의 도시 오멜라스**. 그 도시의 지하실에 갇혀 있는 한 아이. 모든 사람들이 그 아이의 존재를 안다.
그러나 그들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중략) 그것이 바로 계약인 것이다.

오멜라스의 행복과 아름다움을 이 아이와 맞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향한 부당한 행위에 가슴 아파하면서 흘리던 눈물은 현실의 끔찍한 정의를 알아차리고 이를 받아들이면서 메말라 간다. 하지만 오멜라스 사람들의 눈물, 분노, 자비를 베풀려는 시도 그리고 자신들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태도야말로 오멜라스 사람들이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 주는 진정한 근원이리라.

그러나 이 아이를 본 어떤 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시를 떠난다.
성인이든 청소년이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상관없이 그 사람들은 모두 혼자서 간다.

어디로 가는 걸까? 상상하기 어렵고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곳이다.
그러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알고 있는 듯하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조금 현실적으로, 조금 비관적으로 생각해 보자.
싸고 맛있는 미국산 소고기를 먹고 싶은, 팔고 싶은 사람도 있다.
일몰 후 불법 집회는 공권력으로 엄중 대응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
한나라당이 과반을 차지한 총선이 치뤄진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았다. 청계광장에 수 만명이 모여도 대운하와 재개발을 지지했던 국민들의 선택은 다음 투표까지 변하지 않는다. 한나라당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촛불을 들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부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 몇 배의 경찰력과 보수 언론의 왜곡("좌파 세력의 반정부 폭력 시위...")으로 간단히 덮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모인다.
어떤 집에는 현수막이 내걸리고,
어떤 동호회는 신문에 광고를 낸다.
어떤 카메라는 현장을 중계하고,
어떤 시민들은 웃으면서 당당히 연행된다.

배후 세력을 아무리 찾아본들 헛수고리라. 가야할 길을 아는 사람들은 혼자서 가는 법이니까.

주)
* 이 책에 실린 마지막 단편의 제목은 여기서 얘기하지 말자. 작가 왈, "이 이야기는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 새로운 SF 전문 출판 브랜드의 이름이기도 하다.
2007. 4. 18. 16:31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난 11일, 소설가 커트 보네거트가 죽었다. 일주일이나 지나도록 모르고 있었다.

위키피디아에서 [wp.en]Kurt Vonnegut[/wp]를 찾아보았다. 이런 말이 눈에 띈다.

"Vonnegut was a Humanist."

맞는 말이다. 그의 소설은 운명의 주사위 아래에 놓인 인간다움을 그리고 있다.

내가 읽은 번역된 그의 작품들은:

저 위의 누군가가 날 좋아하나봐 (The Sirens of Titan, 1959)
고양이 요람 (Cat's Cradle, 1963)
제5도살장 (Slaughterhouse-Five, 1969)
갈라파고스 (Galapagos, 1985)
타임퀘이크 (Timequake, 1997)
그리고 몇 편의 단편들.

한 때는 그의 글을 정말 읽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소설이 된 타임퀘이크는 몇 달 전에 사서 반쯤 읽고 책장에 꽂혀만 있다. 언제 다시 읽게 될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인생은 그렇게 가는 것"이라고 대꾸할 그이지만, 왠지 슬픈 건 어쩔 수 없다.

P.S. 그라면, 미국 대학에서 수십명을 총으로 죽인 한국 학생에 대해 뭐라고 말했을까?
2007. 3. 21. 15:11
시간은 기억을 통해 인식되고, 기억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

[albook|small|right|8990048524|]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Why Life Speeds Up As You Get Older, 다우베 드라이스마, 2001

10대, 20대에는 일년이 참 길게 느껴진다. 반면 나이가 들수록 지난 한 해가 어떻게 그리 금방 지나가버렸는지 놀랄 때가 많다. 이 책은 그 의문에 대답하기 위해 자전적 기억(autobiographical memory)의 본질을 심리학의 역사 속에서 탐구한다.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난 젊은 시절은 떠올릴 기억이 별로 없는 노년보다 느리게 느껴진다. (회상 효과) 그리고 젊은이의 생체시계는 대개 노인의 생체시계보다 빨리 움직인다. (생리적 시계) 이 두가지 이론은 그 의문에 대한 불완전한 답이다. 그러나 이 책은 시간과 기억에 대한 그 이상의 수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망각'이란 제목의 장에서는 기억상실증의 진행을 묘사하면서 어떤 할머니가 이미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쓴 편지가 소개된다. 1분 전에 자기가 쓴 문장도 기억하지 못해 같은 말이 반복되는, 사실인지 모를 과거의 조각들만이 나열된.

작년 가을에 발표차 폴란드에 가는 길에 이 책을 사서 푹 빠져 읽었다. 그리고 오늘, 다른 한 권의 소설을 다 읽은 다음, 책장에서 다시 꺼내 펼친다. 이런 대목이 있다: 노인성 치매 환자가 기억을 잃어버릴 때는, 가장 최근의 기억이 가장 먼저 사라지고 가장 오래된 기억이 가장 마지막에 사라진다...

[albook|small|right|895274246X|]스몰 월드 Small World, 마틴 수터, 1997

치매: 정상적이던 지능이 대뇌의 질환 때문에 저하된 것
알츠하이머 병: 노인성 치매의 가장 흔한 원인, 대뇌의 신경세포가 변성, 사멸하는 질환

이 소설은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한 남자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의 세상이 변해온, 그리고 변해가는 과정을 다룬 일종의 추리소설이다. 주인공은 알츠하이머 병의 진행으로 기억을 잃어가며 일상적인 행동마저 어려워진다. 그럴수록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은 혼란스러운 형태로 드러나며 의문은 깊어진다.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이로 돌아간 그가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병의 진행을 막으려는 노력은 성공할 수 있을까?

비록 추리물로서의 긴장감이 덜하다 하더라도 이 이야기는 살인사건이 아닌 한 사람의 기억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색다른 즐거움과 긴장을 준다. 무엇보다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주인공의 행동은 너무나 현실감 있게 묘사되어 있어 독자의 안타까움을 더한다.

나는 이 책을 몇 달 전에 인터넷 서점에서 '덤으로' 받았다. 2005년에 번역되어 나왔으나 그리 잘 팔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최근까지 손도 대지 않다가 며칠 전에 펴 들었다. 잠자리에서 읽을 책이 다 떨어진 까닭이다. 그런데 내가 언제나 마음에 두고 있는 생각의 실마리 - 시간과 기억 - 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되어 엮일 줄이야. 덕분에 '나이가 들수록...'까지 보태어 이렇게 감상을 적는다.

덧붙여 잡담...

다우베 드라이스마의 책에는 기억의 은유로 활동사진(영화)을 사용하여, '기억은 왜 거꾸로 돌리기가 안 되는가'하는 의문을 탐구하는 내용이 있다. 우리의 기억은 과거 어디로든 자유롭게 오갈 수 있지만, 제대로 보려면 반드시 시간 순서대로 돌려야 한다는 것. 흥미로운 사실은 요즘의 디지털 동영상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재생된다는 점이다.

디지털 동영상은 프레임frame이라 불리는 연속되는 장면들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용량을 줄이기 위해 데이터 압축이 필요한데, 각각의 프레임은 하나의 JPEG 그림 파일처럼 압축해서 저장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이어지는 각 프레임들 사이에서도 이른바 시간적 압축이 가능한데, 그림으로 보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렇게 각 프레임이 그대로 저장될 수도 있지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두번째 그림처럼 일정한 간격의 완전한 프레임 사이에 영상이 변하는 부분만을 저장해도 재생이 가능할 것이다. 이 때, 완전한 프레임(1,5)을 키key 프레임, 그 중간의 부분적인 영상만을 가진 프레임(2,3,4)을 델타delta 프레임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시간적 압축이 된 동영상에서 재생은 키 프레임에서 시작하여 시간의 방향으로만 가능하다. (잘라서 붙이는 등의 편집 작업도 키 프레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어째 앞서 얘기한 '거꾸로 돌릴 수 없는' 기억과 비슷하지 않은가? 키 프레임과 뒤로 이어지는 델타 프레임들의 한 단위가 기억의 한 토막에 해당한다.

동영상 압축 기술이 인간의 기억 방식을 본떴다는 이 주장은 검증하기가 곤란할 것 같다.
2007. 1. 26. 19:06
책 소개가 너무 잦은 편인가요?
제목 그대로, 재미있지만 읽기 어려운 소설 두 권을 소개합니다.
재밌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읽기 어렵다는 (그래서 잘 팔리지 않는다는) 점에는 사람들이 대부분 동의합니다. ^^;

미국의 송어낚시, 리처드 브라우티건, 1967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다카하시 겐이치로, 1988

미국의 송어낚시와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책상 위에 나란히 놓고 찍었습니다.

시간 1
"미국의 송어낚시"는 93, 94년 경, 제가 대학생일 때 산 책입니다. 종이가 많이 바랬습니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는 작년 7월경에 사고 최근에야 읽기 시작해서 아직 반도 못읽었습니다.

시간 2
미국의 송어낚시 - 1991년 3월 25일 초판 인쇄, 1991년 4월 20일 1쇄 발행
어떤 분 曰, "책을 좋아하는 친구에게는 보여주지도 말아야 한다"는 초판본을 갖고 있습니다. 2002년과 최근에 새 판이 나왔네요.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초판 1쇄 발행 1995년 3월 15일, 재판 1쇄 발행 2005년 7월 7일
우리 나라에선 10년동안 각계 각층의 팬들이 절판된 이 책을 구하고 싶어했습니다.

오해
"미국의 송어낚시"는 가끔 서점의 낚시 코너에서 찾을 수 있었답니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가 많은 책방에서 스포츠 코너에 있었다는 사실을 작가도 알고 있네요.

인용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읽고 미국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사람은 카프카였던가…….
'건전하고 낙천적이기 때문에 나는 미국인들이 좋다'라고 말한 카프카 말이다.
(미국의 송어낚시, 16쪽)
"야구(사어死語)………아주 옛날에 죽었기 때문에 잘 모른다. 긴 것으로 둥근 것을 치는 게임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지면에 네모난 것을 놓고 악귀를 쫓았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82쪽)


작가

미국의 송어낚시 표지

1974년 페이퍼백판

[wp.en:Richard Brautigan]리처드 브라우티건[/wp] - 제가 좋아하는 커트 보네거트가 이 작가를 추천했습니다. 책 뒤에 실린 작가 인터뷰에서 "미국의 송어낚시"가 한국어로 번역되면 기쁘겠다고 얘기한지 얼마 되지 않아 1984년 권총자살. (책 표지에 나온 이 남자!)
[wp.ja:高橋源一郎]다카하시 겐이치로[/wp] - 대학 재학중 학생운동에 참가해 체포된 경력이 있고, 이로 인해 극심한 실어증을 경험. 소설을 쓰기 전 70년대에는 육체노동을 했습니다.

평가
미국의 송어낚시 - 포스트모더니즘, 현대의 목가, 생태주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대한 비평, 언어 표현의 해체와 재구축

감상
인터넷 식으로 말하자면, "제목은 훼이크!"
그렇지만 읽고 나면 결국 그 제목만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에 그것이 '없기' 때문일까요.
"미국의 송어낚시"는, 제게 평생 절대로 버리지 않을 책 중 하나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펴보지도 않았지만 말입니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역시 그렇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내용이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글을 쓰면서 인터넷 검색을 하다보니 이 두 책에 대해 저랑 비슷한 느낌을 가지신 분이 있었습니다. 확실히 이들은 서로 닮았습니다.
http://readme.kr/blog/archives/000581.html

두 책의 알라딘 링크를 남겨둡니다.
[albook|small|left|8992036248|height=150][albook|small|left|8901050145|height=150]

2006. 8. 27. 00:22
[albook|small-jpg|left|8952894200|]라이드백 1-5 (원제: RIDE BACK, 2004-2005), 카사하라 테츠로, 대원씨아이, 2005-2006 (소학관의 월간 IKKI에서 연재 중, 현재 6권까지 출판).
남쪽으로 튀어! 1,2 (원제: Southbound, 2005), 오쿠다 히데오, 은행나무, 2006.

애니메이트 동호회 이야기 게시판에서 신중관님의 글을 읽고 “라이드백”을 5권까지 샀습니다. 남편 닮아 역시 책을 잘 지르는 아내는, 서점에서 “남쪽으로 튀어!” 두 권을 한꺼번에 들고 왔습니다. (지금 1권 값에 2권까지 껴 주네요.) 우연히도 두 책은 통하는 게 있습니다. “라이드백”은 2020년 일본의 학생운동을 배경으로, “남쪽”은 과거 급진 좌익에 몸담았던 부부가 만들어가는 오늘날의 일본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SF라고는 하나, “라이드백”은 분명 일본의 60년대를 그리고 있으니, 둘 모두 지금은 추억할 거리도 안되는 ‘과거’에 조금은 기대고 있는 셈이죠.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이제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albook|small-jpg|right|8956601615|]“라이드백”의 배경이야 누가 보더라도 60년대 일본 안보투쟁의 알레고리이고, (무단 링크 - 일본의 운동) 작가 역시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작가 왈, “RIDE BACK - 이야기에 등장하는 머신 호칭 외에도 다른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2020년까지 라이드백이라는 바이크 머신의 개발과 상용화에 걸린 시간이 필요했겠죠. 그럴듯한 메카닉도 없이 대놓고 구닥다리 얘기를 꺼내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어쨌든 미래 같지 않은 미래에서 어쩌다(!) 라이드백에 올라탄 소녀 오가타 린은 학생운동의 표상icon이 됩니다. 놀라운 행동 능력에 대중적 인기까지 더해져 그녀는 각 정치세력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죠. 이용당하거나, 제거되거나. 하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떠나 자신의 의지로 라이드백을 타고 집회 현장을 누빕니다. 걷고 달리고 점프하는 그녀의 Fuego(불)는 말 그대로 불타는 열정이군요.

“남쪽”의 주인공은 화자인 아들 “지로”이지만, 부모님과 아이들(누나, 지로, 여동생)이 각각 이야기의 두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는 “아시아 혁명 공산주의자 동맹” - 줄여서 革共同, 무시무시한데요. - 에서 60년대 말까지 활동하다가 탈퇴한 아나키스트이고, 공권력, 세무서, 학교 등 국가기관과 사사건건 충돌하는데다 옛 정을 생각해서 협력한 과거 조직에게도 배신을 당합니다. 아주 제대로 사회 부적응이죠. 자식들도 나이에 맞춰 험하게 살기는 매한가지고, 어머니는 누구 편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과거는, 뻔하긴 하지만 누나의 비밀과 더불어 일종의 수수께끼 장치로 독자의 흥미를 끕니다. 아버지란 인물은 대체 얼마나 대단한 좌익 활동가였을까요? (방수차에 미군 팬텀기까지…) 어머니가 칼로 사람을 찌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들 가족은 과연 조용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쩔 수 없이 구석으로 내몰려 제목대로 남쪽으로 튀기는 합니다만 남쪽이라고 만만하지는 않겠죠.

두 이야기의 구체적인 사건들은 책을 직접 보고 확인하시고, “라이드백”은 연재 중이라서 결말을 종잡을 수도 없답니다. 그래도 저 나름의 감상과 앞서 약속한 공통점은 정리를 해야죠.

라이드백 소녀 오카타 린이나 전설적인 활동가 우에하라 이치로가 멋있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운동에 환멸을 느꼈거나, 우익에 몸담고 있거나, 아무튼 ‘열혈’이 아님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해방구인 대학의 뒷문에서 배신당하고 체포되는 린, 튀어 간 남쪽에서 또 도망쳐야 하는 우에하라 부부의 모습은 행복한 삶과는 삼만 광년 떨어져 있습니다. (혹자 왈, 우에하라 이치로는 아동학대를 저지르고 있다는군요.) 그것도 동료에게, 조직에게 배신을 당한 채 홀로라니 학생운동이든 독립운동이든 운동을 하면 삼대가 고생한다는게 허튼 얘기는 아닌가 봅니다. 그래도 “남쪽”의 결말은 나름대로 해피엔딩이니 너무 우울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웅이 자신의 조직에 배신을 당하고 고난을 겪는 스토리야 흔합니다. 주인공이라면 응당 고난을 극복하고 큰 뜻을 펴겠지요. 하지만 현실에서도 늘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결국 혼자니까요. “남쪽”의 지로네 가족은 남쪽에서 이웃들의 도움을 많이 받지만, 그들의 투쟁에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세계여행을 한다는 캐나다 출신 백수 한 명입니다. 자치회의 아이콘 역시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는 초라한 개인으로 돌아가 끌려다닐 뿐입니다 (아직까지는). 그래서 지로의 아버지는 이렇게 얘기하나 봅니다.
“지로,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중략)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아버지는 그중 한 사람이다. 알겠냐?”

세상은 뭔가를 해보기엔 너무 단단하지만, 꿈꾸는 걸 포기하기엔 아직도 정이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좋은 세상을 그리고, 뜻이 맞는 사람들을 찾으려고 애쓰나 봅니다. (노마진 풍으로) 하지만! 결국은 혼자서 싸워야 한다는 것, 그것도 끝까지 싸우지 않으면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조금은 슬프지만 뭐 어떻습니까. 다들 각자의 인생을 사는 건데. 별 대단치도 않은 조직간의 갈등에 사람을 죽이고 구호를 외쳐야만 하는 아빠의 친구 아저씨도 있는 거고, 자치회의 소모품으로 라이드백 소녀의 대역이 되어 경찰의 한 방에 저세상 가버린 철없는 학생도 있으니까요.

사람이 죽어나가는 집회 현장을 자신의 무대로 삼아 - 한때 잘나가는 댄서였거든요 - 학생운동의 아이콘으로 데뷔하는 린과, 법이고 소유고 다 무시하며 불쌍한 시골 순경을 자본가의 앞잡이라고 호통치는 아버지가 저에게 전하는 공통의 메시지는, 네 생각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개인의 사상이야 어린 시절에 형성되는 것이지만, 혼자 결정하고 행동할 만큼 컸다면, 국가가, 학교가, 군대가, 회사가 주입시킨 말도 안되는 주장은 치워두고 - 그런거 주입 받은 적 없다고 불끈하실 분들은 그냥 그대로 살면 됩니다 -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실천하는 것이 주인공의 삶입니다. 린이 Fuego에 올라탄 건 우연이었지만, 시위대의 중심에 선 건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로는 어쩌다 이상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지만, 가족의 집을 지키기 위해 꼴보기도 싫던 아빠와 함께 투쟁하며 어린 아나키스트가 되어갑니다. 운동이 무너지고 타락하고 희화화된 시대에 가장 위력적이고 파괴적인, 끝까지 저항하는 주체는 결국 나 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나도 주사파?) 지로에게 고독을 두려워 말라는 아빠의 당부는, 어째 너무 현실적으로 들립니다.

이 두 책의 이야기는, 무대 위로 날아오를 라이드백도 없고 튄다는 명목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남쪽도 없는 보통 사람들을 좌절시키는 그런 스토리가 아닙니다. 땅 주인과 맞서는 “남쪽”은 말할 것도 없고 - 제가 전세금을 날려먹은 적이 있어 더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 , “라이드백” 5권까지의 진행이 전반적으로 암울하긴 하지만 이 작가는 “공상과학 에디슨”에서 맛만 보여준, SF적인 비전을 가졌으니까요. 하긴, 제가 이런 글을 써서 올리는 것만 봐도 이 책들은 뭔가 힘을 주는 게 분명히 있습니다.

P.S.
“남쪽”의 말미에서 지로 어머니가 떠나기 전, 딸에게 감동적인 한 마디를 남깁니다.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다, 속이지 않는다, 질투하지 않는다, 위세부리지 않는다, 악에 가담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나름대로 지키며 살아왔어. 단 한 가지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 있다면 그저 이 세상과 맞지 않았던 것뿐이잖니?”
“그게 가장 큰 문제 아냐?”
아줌마, 큰딸은 이미 다 컸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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