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2. 8. 13:00
[일상/독서]
일본 미스터리 문학 즐기기 카페에 '느린시간'이란 닉네임으로 남겼던 글과 댓글을 재활용하여, 올해 하반기에 읽은 일본 추리소설 신간들에 대한 감상을 정리해 봅니다. (책을 읽은 분들만을 위한, 불친절하고 스포일러 가득한 리뷰랍니다.)
참고: 올해 읽은 일본 추리소설 재활용 리뷰 (이건 상반기)
[albook|small|right|8992036671|width=100]<통곡>, 누쿠이 도쿠로
<통곡>에 대한 아내의 삐딱한 평
지금 보니 <통곡> 이벤트에 백플이 달려 있네요. 높은 인기예요.
사실 저도 참가할까 하다 별로 쓸 말이 없어서 - 도를 만나면 도망가기 바빠요 - 그만두고 사서 읽었죠.
아내가 먼저 읽었습니다. 상당히 빠른 진도를 보이던데 내용을 미리 알고싶지는 않아서 다 읽을 때까지 일부러 말도 안 걸었습니다. 중간쯤에서 술술 읽히기는 한데 사건 진행이 지루하다고 한마디 하더군요. 그리고 밤늦게 다 읽더니 피식 웃는 겁니다.
"좀 시시해. 나는 눈치챘어."
설마, 최근 여기서 읽은 <통곡>의 평들은 찬사 일색이었는데... 어쨌든 저도 이제 책을 잡아듭니다.
마쓰모토라는 이름의 정체모를 인물은 신흥 종교에 깊이 빠져들면서 자신의 가슴 속 구멍을 메워줄 빛을 찾으려 합니다.
한편, 유아 유괴살인사건이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수사는 답보 상태인 가운데, 수사1과 과장의 스트레스도 심해져 갑니다.
이야기는 이 두 사람을 교차시키며 진행됩니다. 이 소설의 문장은 군더더기가 없기에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전혀 비치지 않음에도 독자는 책을 내려 놓기 어렵습니다. 책의 남은 분량은 자꾸 줄어드는데 수사는 오리무중, 대체 어떤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엉뚱한 상상만 하게 됩니다.
449쪽, 두 사람의 이야기는 여기서 만나 결말을 짓습니다. 이거 참, 이 반전은 참신성보다는 오히려 그 '정교함'에 쓴웃음을 짓게 됩니다. 뒤집어 얘기하자면 너무나도 작위적인, 억지스럽다는 느낌. 불공정하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러나 솔직한 감상은, 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되다 만 소설"
이란 평에 공감하게 되는군요. 평범한 독자들의 기대와는 다른 곳에서 끝이 났다고 할까요. 하긴 천인공노할 살인마일수록 추리소설에서 다루기는 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통곡>은 여러 가지 소재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유괴살인사건 자체를 제외하고도 신흥종교(<미륵의 손바닥>에서 본 적이 있고), 경찰 조직의 갈등(캐리어와 논캐리어 얘기는 너무 많이 들었어요), 매스컴의 보도경쟁(와이드 쇼 하면 <모방범>) 등은 일본 미스터리 독자에게는 꽤 익숙하죠. 이것들이 분위기나 상황을 그려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조금 더 흥미롭게 이야기 속으로 녹아들어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아요.
책에 대해 많은 기대를 갖고 계실 분들께는 조금 미안한 얘기만 늘어놓았군요. 우리 부부의 생각일 뿐이예요. ^^
<통곡>의 가장 큰 장점은 흡인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460여 쪽을 읽어가면서 그렇게 지루한 부분은 없었던 걸로 기억해요. 때로는 미궁에 빠진 사건 때문에 골치아픈 형사의 입장에서, 때로는 구원을 찾아 사이비 교단에 빠져드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독자 역시 같이 고민하면서 사건을 안타깝게 맞이하게 되니까요. 실컷 안좋은 소리 하다가 뜬금없지만, 분명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스포일러:
'반전'하면 <살육에 이르는 병>과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들게 되는데, <통곡>의 반전은 그 둘 - '관계'와 '시간' - 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네요. 다른 종류의 연속살인사건으로 그려낼 수는 없었을까요? 트릭이 아까워서 말이죠.
번역하신 분이 개인적으로 남겨주신 댓글 중에서:
<인사이트 밀>, 요네자와 호노부
<인사이트 밀>의 살인 도구에 대한 시시콜콜 잡담
<인사이트 밀>을 재미있게 읽으신 미스터리 팬들과 함께 나누고픈 잡담입니다.
이 작품의 여러 가지 살인 방법과 도구에는 나름의 설명과 출전이 같이 나와요. 순서대로,
이들 작품 중 몇 개나 읽어보셨나요? 제가 제대로 읽은 건 넷 밖에 없지만 책에서 맨 처음 나오는 얼룩끈에서부터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얼룩끈에서의 살인 도구는 워낙 유명한 '그것'이지, 부지깽이는 아니니까요. 홈즈를 모르는 미스터리 팬이 있어도 이상할 것 없는 현실이니 얼룩끈의 범인은 부지깽이를 휘둘러 살인을 저지른다는 큰 오해가 생길 수 있겠는걸요. 좀 더 살펴봅시다.
녹색 캡슐의 수수께끼는 번역이 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작품 안에서 나중에 친절히 설명해 줍니다. 독은 니트로벤젠이 아니라 청산가리라고요.
구석의 노인 사건집의 끈에 이르면 이건 작가의 장난이란 생각이 들게 돼요. 제가 아는 한 그 끈은 절대로 목을 조르지 않거든요.
X의 비극은 어릴 적에 읽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네요. 어쨌든 여기서는 니코틴이 쓰이는 게 맞습니다.
제3의 총탄에서는 결국 22구경 공기총이 살인 흉기로 드러나지요.
백발귀는 못 읽어봤습니다. 짐작컨대 산 채로 무덤에 묻히는 거라면 압살은 대충 맞지만 그 도구는 상당히 다르군요.
비숍살인사건에 대해서도 작품 안에서 설명합니다. 보우건(석궁)이 아니라 보통 활(장궁)이 흉기로 쓰인다고요. 이 정도는 상황에 맞춘 변화라고 볼 수도 있죠.
두 개의 미소를 가진 여인에 대해서는 불행히도 전혀 모릅니다. 패스.
끝으로 이누가미 일족은 가장 최근에 읽은 소설이군요. 이건 "도끼가 실제로 사용되면, 거꾸로 세워 놓을 필요가 없어지잖아."라는 대사처럼, 이누가미 일족을 읽은 사람이라면 웃을 수밖에 없는 매칭이랍니다. 작가도 그걸 의도한 듯해요.
정리한다고 했지만 뒤죽박죽이군요. 각각의 도구는 미스터리 작품과 관련이 있기는 한데, 좀 엉뚱하게 연결한 것이 몇몇 있어요. 부지깽이, 끈, 그리고 도끼의 경우에는 확실히 작가의 의도, 또는 장난이 보여요. "독자들이여, 고전을 읽자"라는 메세지 같기도 하고. 그 효과가 있었는지 이누가미 일족이 어서 나오기를 제가 간절히 기다렸던 것은 이 소설 때문이기도 했어요.
십각관의 등장인물들(카, 오르치, 엘러리, 반 다인, 모리스 등)이 생각나기도 하는, 대담하고 즐거운 소설이었습니다.
[albook|small|right|8984013137|width=100][albook|small|right|8989722802|width=100]<이유>, 미야베 미유키
<유리 망치>, 기시 유스케
- 이 두 작품은 신간이 아니지만...
미스터리와 경제 - 이유, 유리망치
세계 경제가 흔들리고 있어요. 이유야 어쨌든 우리 나라 사정은 더 심각하구요.
일본 미스터리 독자 입장에서는, 판권료나 종이값 덕분에 책값이 더 오르겠거니 하는 걱정이 먼저군요.
경제와 장르문학의 상관관계는 어떨까요? 청년 실업이 늘수록 온라인게임이 인기인 현실과 비슷할까요, 아니면 오락소설 따위에 더 이상 쓸 돈은 없어질까요? 어쩐지 후자가 더 그럴 듯하네요.
그런 까닭인지, 경제 문제가 녹아 있는 미스터리 작품은 드물죠. 저는 <이유>와 <유리망치>가 생각나요.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는 일본의 부동산 버블 붕괴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90년대 초부터 시작된 일본의 경기 침체는 그 유명한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을 만들어 냈고, 작가는 그 혼란 속에 자리한 뉴시티 웨스트타워 2025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잔인하도록 담담하게 그리고 있지요.
전용면적 101.24제곱미터니까 분양면적은 대충 40평형인 셈인가요. 2025호의 분양가는 1억720만엔이었고, 분양받은 첫 주인은 전매를 목적으로 구입했다가 부동산이 폭락하자 1년 후 8250만엔에 매물로 내놓았고 결국 8120만엔에 팔았죠. 다음 주인은 1년 반 뒤에 7250만엔에 팔 수밖에 없었구요. 세번째 주인인 고이토 부부는 자기 돈 3500만엔에 나머지는 빌려서 이 집을 샀어요. 이 때가 1992년 봄이군요. 스포일러랄 것도 없이, 이 부부는 대출금을 갚지 못하고 집은 경매에 나오게 돼요. 그러나 비극은 이제 시작이죠. 이 숫자들은 요즘들어 더 실감이 나는군요.
<유리망치>의 2부는 아키라란 소년의 이야기예요. 1부의 밀실살인과는 전혀 이어지지 않는 이 고등학생의 험난한 인생은, 팔라듐(백금과 비슷한 귀금속의 일종) 선물거래에 손대기 시작한 아버지의 몰락에서 시작하지요. 투자 초반에 큰 이익을 냈다가 상황이 나빠지자 선물거래회사 직원은 아버지를 이렇게 꼬드겨요. "걱정 마세요. 조금만 참으면 됩니다. 시장은 반드시 반전됩니다. 지금까지의 손해는 열 배가 돼서 돌아옵니다." 그리고 결국 고리대금업자를 찾게 되죠. 그 뒤는 안봐도 비디오.
'물타기'가 뭔지 아시죠? 주가가 내려 손실이 났을 때 추가매입해서 반등시 수익을 기대하는 건데, 하락장에서 증권회사 직원이 하는 얘기가 늘 그렇죠. 바닥이 보인다고, 저가매수의 기회라고. 엊그제 은행에 갔는데 옆 창구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펀드를 해지하는 것 같더라구요. 집에 가셔서 부부싸움 같은 거 하지 마시고 그냥 깨끗이 잊어버리셨기를.
어쨌든 이것만 보면 미스터리 속에서 경제는 사람들에게 복수의 동기를 제공하는 역할 밖에 못하는 것 같아요. 돈이 아닌, 경제 현실을 담고 있는 다른 미스터리 작품들이 궁금해지네요. 제가 미스터리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albook|small|right|8925811235|width=100]<얼음꽃>, 아마노 세츠코
읽고 나서 생각하는 '얼음꽃'의 몇 가지 의미
<얼음꽃> 이벤트에 당첨되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출판사와 이 카페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1. 부서지기 쉬운
괜찮은 회사 사장의 조카인 주인공은 그 회사에서 일하는 남편과 함께 풍족하게 살고 있습니다. 안락한 저택에 보장된 미래, 그리고 가끔 대학 동창들과의 모임을 즐깁니다. 그러나 남편이 출장 중인 어느날, (언제나 그렇듯) 갑자기 걸려온 전화가 이런 일상을 바꿔놓습니다. 남편의 내연녀라는 전화 속 인물은 남편의 글씨가 적힌 '모자母子 건강 수첩'으로 주인공을 도발합니다.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 그러나 자신은 불임. 주인공은 이성을 잃고 맙니다.
2. 차가운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주인공의 행동은 냉정합니다. 남편은 이틀 뒤 돌아오는데다 약속들도 잡혀 입습니다. 적敵의 주소를 쉽게 알아낸 뒤, 남편의 열쇠꾸러미에서 수상한 열쇠를 확보, 완벽히 준비한 뒤 잠입합니다. 그리고 냉장고 속 주스에 농약을 탑니다. 문제는 그곳에 있던 두 사람의 사진과 모자수첩. 둘을 가지고 나오려던 그녀는 다시 생각해보고 제자리에 돌려 놓습니다. 있어야 할 것이 없다면 중요한 단서가 되리라 생각했겠죠. 알리바이도 나름 준비한 뒤, 주인공은 친구와의 약속시간에 정확히 나타납니다. 계획대로 그 여자는 죽었고, 이렇다할 증거도 남지 않았습니다.
3. 고독한
경찰 수사가 진행됩니다. 공교롭게도 죽은 여자는 주인공 남편의 회사 직원. (언제나 그렇듯) 한 형사의 직감이 주인공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 단서는 엉뚱하게도 '남편의 회사 책상 서랍'에서 발견된 죽은 여자와의 사진입니다. 수사 진행에 관심을 갖고 있던 주인공도 의혹을 품게 됩니다. 겨우 이런 여자에게 남편이? 자신의 복수는 제대로 이루어진 것인가? 그 와중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과거의 사건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와도 상의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여기까지가 대략 1/3의 내용입니다. 중요한 몇가지 단서는 일부러 적지 않았습니다. ^^)
4. 날카로운
주인공은 이런 상황에 끌려다닐 인물이 아닙니다. 양친을 비행기 사고로 잃었을 때도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안흘린 아이였는걸요. 물론 이런 설정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없을만큼, 오직 하나의 목표물 - 남편과 X - 을 향한 그녀의 증오는 마치 비수와도 같습니다. 경시청의 민완 형사가 아무리 열심히 (그러나 조금 지루하게) 수사를 펼쳐도 여기엔 당할 수가 없네요. 이 소설의 백미는 주인공에 대한 형사들의 심문 장면인데, 그래서인지 용의자와 형사가 서로 바뀐 것 같답니다.
5. 마지막으로
반전이 있기는 합니다만 내용은 실질적으로 책의 'File 7: 재판' 부분에서 끝이 납니다. 재판이니 누가 이겼을까요? 궁금하시면 읽어보셔야죠. 이 책의 장점은 주인공의 심리가 드러나는 행동의 묘사에 있습니다. 그것은 애 아빠인 제가 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서 더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책을 손에서 뗄 수 없게 끌어가는 힘은 강한데 비해 기대했던 결말이 조금 완만합니다. 요즘은 낭떠러지 같은 결말이 유행이라서요. 여기서는 사건의 정체가 중반부터 조금씩 밝혀지다보니 독자에게 큰 충격은 못 줄 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궁금한, 아마도 추리소설로서 논쟁이 될 부분은 사람의 행동이 그렇게 정확하게 예측 가능하냐는 건데 (이런 의문이 두 번 들게 됩니다), 그 두 번 모두 작은, 그러나 치명적인 실수가 등장하니까 나름 공정합니다. 그리고 '얼음꽃'의 마지막 의미는... 아, 1번에서 벌써 얘기했군요.
사족같은 댓글:
히가시노 게이고의 <브루투스의 심장>이 사람을 조종하는 일은 맘대로 안된다는 쪽이었다면, <얼음꽃>은 사람의 감정과 행동을 대체로 예상할 수 있다는 편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대립하는 양자가 이를 각각 활용하는 구성은... 아, 더 얘기하면 안됩니다. '그의 한마디로 밝혀지는 충격적인 진실'류와는 거리가 있지만, <얼음꽃>의 전체적인 구성과 전개는 아주 훌륭합니다. 곰곰히 되새겨볼수록 더 그래요.
덤으로, 다시 찾아본 기억과 추억의 차이
PS
오늘 아침 책을 덮은 <도착의 론도>, 상권 중간쯤에서 손을 놓은 <도구라마구라>에 대해서도 조만간 뭔가 적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지요.
참고: 올해 읽은 일본 추리소설 재활용 리뷰 (이건 상반기)
[albook|small|right|8992036671|width=100]<통곡>, 누쿠이 도쿠로
<통곡>에 대한 아내의 삐딱한 평
지금 보니 <통곡> 이벤트에 백플이 달려 있네요. 높은 인기예요.
사실 저도 참가할까 하다 별로 쓸 말이 없어서 - 도를 만나면 도망가기 바빠요 - 그만두고 사서 읽었죠.
아내가 먼저 읽었습니다. 상당히 빠른 진도를 보이던데 내용을 미리 알고싶지는 않아서 다 읽을 때까지 일부러 말도 안 걸었습니다. 중간쯤에서 술술 읽히기는 한데 사건 진행이 지루하다고 한마디 하더군요. 그리고 밤늦게 다 읽더니 피식 웃는 겁니다.
"좀 시시해. 나는 눈치챘어."
설마, 최근 여기서 읽은 <통곡>의 평들은 찬사 일색이었는데... 어쨌든 저도 이제 책을 잡아듭니다.
마쓰모토라는 이름의 정체모를 인물은 신흥 종교에 깊이 빠져들면서 자신의 가슴 속 구멍을 메워줄 빛을 찾으려 합니다.
한편, 유아 유괴살인사건이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수사는 답보 상태인 가운데, 수사1과 과장의 스트레스도 심해져 갑니다.
이야기는 이 두 사람을 교차시키며 진행됩니다. 이 소설의 문장은 군더더기가 없기에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전혀 비치지 않음에도 독자는 책을 내려 놓기 어렵습니다. 책의 남은 분량은 자꾸 줄어드는데 수사는 오리무중, 대체 어떤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엉뚱한 상상만 하게 됩니다.
449쪽, 두 사람의 이야기는 여기서 만나 결말을 짓습니다. 이거 참, 이 반전은 참신성보다는 오히려 그 '정교함'에 쓴웃음을 짓게 됩니다. 뒤집어 얘기하자면 너무나도 작위적인, 억지스럽다는 느낌. 불공정하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러나 솔직한 감상은, 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되다 만 소설"
이란 평에 공감하게 되는군요. 평범한 독자들의 기대와는 다른 곳에서 끝이 났다고 할까요. 하긴 천인공노할 살인마일수록 추리소설에서 다루기는 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통곡>은 여러 가지 소재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유괴살인사건 자체를 제외하고도 신흥종교(<미륵의 손바닥>에서 본 적이 있고), 경찰 조직의 갈등(캐리어와 논캐리어 얘기는 너무 많이 들었어요), 매스컴의 보도경쟁(와이드 쇼 하면 <모방범>) 등은 일본 미스터리 독자에게는 꽤 익숙하죠. 이것들이 분위기나 상황을 그려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조금 더 흥미롭게 이야기 속으로 녹아들어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아요.
책에 대해 많은 기대를 갖고 계실 분들께는 조금 미안한 얘기만 늘어놓았군요. 우리 부부의 생각일 뿐이예요. ^^
<통곡>의 가장 큰 장점은 흡인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460여 쪽을 읽어가면서 그렇게 지루한 부분은 없었던 걸로 기억해요. 때로는 미궁에 빠진 사건 때문에 골치아픈 형사의 입장에서, 때로는 구원을 찾아 사이비 교단에 빠져드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독자 역시 같이 고민하면서 사건을 안타깝게 맞이하게 되니까요. 실컷 안좋은 소리 하다가 뜬금없지만, 분명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스포일러:
'반전'하면 <살육에 이르는 병>과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들게 되는데, <통곡>의 반전은 그 둘 - '관계'와 '시간' - 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네요. 다른 종류의 연속살인사건으로 그려낼 수는 없었을까요? 트릭이 아까워서 말이죠.
번역하신 분이 개인적으로 남겨주신 댓글 중에서:
... 옮긴이가 이런 말 하는 게 우스운 경우라는 걸 알면서도, 통곡에 대해 많은 분들의 찬사에, '아니 그렇게 훌륭한 소설이었단 말인가' 하며 당혹스러워했었습니다. ...

<인사이트 밀>의 살인 도구에 대한 시시콜콜 잡담
<인사이트 밀>을 재미있게 읽으신 미스터리 팬들과 함께 나누고픈 잡담입니다.
이 작품의 여러 가지 살인 방법과 도구에는 나름의 설명과 출전이 같이 나와요. 순서대로,
구살 - 부지깽이 - 얼룩끈 (코난 도일)
독살 - 니트로벤젠 - 녹색 캡슐의 수수께끼 (존 딕슨 카)
교살 - 끈 - 구석의 노인 사건집 (오르치)
약살 - 니코틴 - X의 비극 (엘러리 퀸)
총살 - 22구경 공기총 - 제3의 총탄 (존 딕슨 카)
압살 - 천장 - 백발귀 (에도가와 란포)
사살 - 보우건 - 비숍살인사건 (반 다인)
격살 - 돌 - 두 개의 미소를 지닌 여인 (모리스 르블랑)
참살 - 손도끼 - 이누가미 일족 (요코미조 세이시)
독살 - 니트로벤젠 - 녹색 캡슐의 수수께끼 (존 딕슨 카)
교살 - 끈 - 구석의 노인 사건집 (오르치)
약살 - 니코틴 - X의 비극 (엘러리 퀸)
총살 - 22구경 공기총 - 제3의 총탄 (존 딕슨 카)
압살 - 천장 - 백발귀 (에도가와 란포)
사살 - 보우건 - 비숍살인사건 (반 다인)
격살 - 돌 - 두 개의 미소를 지닌 여인 (모리스 르블랑)
참살 - 손도끼 - 이누가미 일족 (요코미조 세이시)
이들 작품 중 몇 개나 읽어보셨나요? 제가 제대로 읽은 건 넷 밖에 없지만 책에서 맨 처음 나오는 얼룩끈에서부터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얼룩끈에서의 살인 도구는 워낙 유명한 '그것'이지, 부지깽이는 아니니까요. 홈즈를 모르는 미스터리 팬이 있어도 이상할 것 없는 현실이니 얼룩끈의 범인은 부지깽이를 휘둘러 살인을 저지른다는 큰 오해가 생길 수 있겠는걸요. 좀 더 살펴봅시다.
녹색 캡슐의 수수께끼는 번역이 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작품 안에서 나중에 친절히 설명해 줍니다. 독은 니트로벤젠이 아니라 청산가리라고요.
구석의 노인 사건집의 끈에 이르면 이건 작가의 장난이란 생각이 들게 돼요. 제가 아는 한 그 끈은 절대로 목을 조르지 않거든요.
X의 비극은 어릴 적에 읽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네요. 어쨌든 여기서는 니코틴이 쓰이는 게 맞습니다.
제3의 총탄에서는 결국 22구경 공기총이 살인 흉기로 드러나지요.
백발귀는 못 읽어봤습니다. 짐작컨대 산 채로 무덤에 묻히는 거라면 압살은 대충 맞지만 그 도구는 상당히 다르군요.
비숍살인사건에 대해서도 작품 안에서 설명합니다. 보우건(석궁)이 아니라 보통 활(장궁)이 흉기로 쓰인다고요. 이 정도는 상황에 맞춘 변화라고 볼 수도 있죠.
두 개의 미소를 가진 여인에 대해서는 불행히도 전혀 모릅니다. 패스.
끝으로 이누가미 일족은 가장 최근에 읽은 소설이군요. 이건 "도끼가 실제로 사용되면, 거꾸로 세워 놓을 필요가 없어지잖아."라는 대사처럼, 이누가미 일족을 읽은 사람이라면 웃을 수밖에 없는 매칭이랍니다. 작가도 그걸 의도한 듯해요.
정리한다고 했지만 뒤죽박죽이군요. 각각의 도구는 미스터리 작품과 관련이 있기는 한데, 좀 엉뚱하게 연결한 것이 몇몇 있어요. 부지깽이, 끈, 그리고 도끼의 경우에는 확실히 작가의 의도, 또는 장난이 보여요. "독자들이여, 고전을 읽자"라는 메세지 같기도 하고. 그 효과가 있었는지 이누가미 일족이 어서 나오기를 제가 간절히 기다렸던 것은 이 소설 때문이기도 했어요.
십각관의 등장인물들(카, 오르치, 엘러리, 반 다인, 모리스 등)이 생각나기도 하는, 대담하고 즐거운 소설이었습니다.
[albook|small|right|8984013137|width=100][albook|small|right|8989722802|width=100]<이유>, 미야베 미유키
<유리 망치>, 기시 유스케
- 이 두 작품은 신간이 아니지만...
미스터리와 경제 - 이유, 유리망치
세계 경제가 흔들리고 있어요. 이유야 어쨌든 우리 나라 사정은 더 심각하구요.
일본 미스터리 독자 입장에서는, 판권료나 종이값 덕분에 책값이 더 오르겠거니 하는 걱정이 먼저군요.
경제와 장르문학의 상관관계는 어떨까요? 청년 실업이 늘수록 온라인게임이 인기인 현실과 비슷할까요, 아니면 오락소설 따위에 더 이상 쓸 돈은 없어질까요? 어쩐지 후자가 더 그럴 듯하네요.
그런 까닭인지, 경제 문제가 녹아 있는 미스터리 작품은 드물죠. 저는 <이유>와 <유리망치>가 생각나요.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는 일본의 부동산 버블 붕괴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90년대 초부터 시작된 일본의 경기 침체는 그 유명한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을 만들어 냈고, 작가는 그 혼란 속에 자리한 뉴시티 웨스트타워 2025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잔인하도록 담담하게 그리고 있지요.
전용면적 101.24제곱미터니까 분양면적은 대충 40평형인 셈인가요. 2025호의 분양가는 1억720만엔이었고, 분양받은 첫 주인은 전매를 목적으로 구입했다가 부동산이 폭락하자 1년 후 8250만엔에 매물로 내놓았고 결국 8120만엔에 팔았죠. 다음 주인은 1년 반 뒤에 7250만엔에 팔 수밖에 없었구요. 세번째 주인인 고이토 부부는 자기 돈 3500만엔에 나머지는 빌려서 이 집을 샀어요. 이 때가 1992년 봄이군요. 스포일러랄 것도 없이, 이 부부는 대출금을 갚지 못하고 집은 경매에 나오게 돼요. 그러나 비극은 이제 시작이죠. 이 숫자들은 요즘들어 더 실감이 나는군요.
<유리망치>의 2부는 아키라란 소년의 이야기예요. 1부의 밀실살인과는 전혀 이어지지 않는 이 고등학생의 험난한 인생은, 팔라듐(백금과 비슷한 귀금속의 일종) 선물거래에 손대기 시작한 아버지의 몰락에서 시작하지요. 투자 초반에 큰 이익을 냈다가 상황이 나빠지자 선물거래회사 직원은 아버지를 이렇게 꼬드겨요. "걱정 마세요. 조금만 참으면 됩니다. 시장은 반드시 반전됩니다. 지금까지의 손해는 열 배가 돼서 돌아옵니다." 그리고 결국 고리대금업자를 찾게 되죠. 그 뒤는 안봐도 비디오.
'물타기'가 뭔지 아시죠? 주가가 내려 손실이 났을 때 추가매입해서 반등시 수익을 기대하는 건데, 하락장에서 증권회사 직원이 하는 얘기가 늘 그렇죠. 바닥이 보인다고, 저가매수의 기회라고. 엊그제 은행에 갔는데 옆 창구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펀드를 해지하는 것 같더라구요. 집에 가셔서 부부싸움 같은 거 하지 마시고 그냥 깨끗이 잊어버리셨기를.
어쨌든 이것만 보면 미스터리 속에서 경제는 사람들에게 복수의 동기를 제공하는 역할 밖에 못하는 것 같아요. 돈이 아닌, 경제 현실을 담고 있는 다른 미스터리 작품들이 궁금해지네요. 제가 미스터리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albook|small|right|8925811235|width=100]<얼음꽃>, 아마노 세츠코
읽고 나서 생각하는 '얼음꽃'의 몇 가지 의미
<얼음꽃> 이벤트에 당첨되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출판사와 이 카페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1. 부서지기 쉬운
괜찮은 회사 사장의 조카인 주인공은 그 회사에서 일하는 남편과 함께 풍족하게 살고 있습니다. 안락한 저택에 보장된 미래, 그리고 가끔 대학 동창들과의 모임을 즐깁니다. 그러나 남편이 출장 중인 어느날, (언제나 그렇듯) 갑자기 걸려온 전화가 이런 일상을 바꿔놓습니다. 남편의 내연녀라는 전화 속 인물은 남편의 글씨가 적힌 '모자母子 건강 수첩'으로 주인공을 도발합니다.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 그러나 자신은 불임. 주인공은 이성을 잃고 맙니다.
2. 차가운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주인공의 행동은 냉정합니다. 남편은 이틀 뒤 돌아오는데다 약속들도 잡혀 입습니다. 적敵의 주소를 쉽게 알아낸 뒤, 남편의 열쇠꾸러미에서 수상한 열쇠를 확보, 완벽히 준비한 뒤 잠입합니다. 그리고 냉장고 속 주스에 농약을 탑니다. 문제는 그곳에 있던 두 사람의 사진과 모자수첩. 둘을 가지고 나오려던 그녀는 다시 생각해보고 제자리에 돌려 놓습니다. 있어야 할 것이 없다면 중요한 단서가 되리라 생각했겠죠. 알리바이도 나름 준비한 뒤, 주인공은 친구와의 약속시간에 정확히 나타납니다. 계획대로 그 여자는 죽었고, 이렇다할 증거도 남지 않았습니다.
3. 고독한
경찰 수사가 진행됩니다. 공교롭게도 죽은 여자는 주인공 남편의 회사 직원. (언제나 그렇듯) 한 형사의 직감이 주인공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 단서는 엉뚱하게도 '남편의 회사 책상 서랍'에서 발견된 죽은 여자와의 사진입니다. 수사 진행에 관심을 갖고 있던 주인공도 의혹을 품게 됩니다. 겨우 이런 여자에게 남편이? 자신의 복수는 제대로 이루어진 것인가? 그 와중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과거의 사건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와도 상의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여기까지가 대략 1/3의 내용입니다. 중요한 몇가지 단서는 일부러 적지 않았습니다. ^^)
4. 날카로운
주인공은 이런 상황에 끌려다닐 인물이 아닙니다. 양친을 비행기 사고로 잃었을 때도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안흘린 아이였는걸요. 물론 이런 설정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없을만큼, 오직 하나의 목표물 - 남편과 X - 을 향한 그녀의 증오는 마치 비수와도 같습니다. 경시청의 민완 형사가 아무리 열심히 (그러나 조금 지루하게) 수사를 펼쳐도 여기엔 당할 수가 없네요. 이 소설의 백미는 주인공에 대한 형사들의 심문 장면인데, 그래서인지 용의자와 형사가 서로 바뀐 것 같답니다.
5. 마지막으로
반전이 있기는 합니다만 내용은 실질적으로 책의 'File 7: 재판' 부분에서 끝이 납니다. 재판이니 누가 이겼을까요? 궁금하시면 읽어보셔야죠. 이 책의 장점은 주인공의 심리가 드러나는 행동의 묘사에 있습니다. 그것은 애 아빠인 제가 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서 더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책을 손에서 뗄 수 없게 끌어가는 힘은 강한데 비해 기대했던 결말이 조금 완만합니다. 요즘은 낭떠러지 같은 결말이 유행이라서요. 여기서는 사건의 정체가 중반부터 조금씩 밝혀지다보니 독자에게 큰 충격은 못 줄 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궁금한, 아마도 추리소설로서 논쟁이 될 부분은 사람의 행동이 그렇게 정확하게 예측 가능하냐는 건데 (이런 의문이 두 번 들게 됩니다), 그 두 번 모두 작은, 그러나 치명적인 실수가 등장하니까 나름 공정합니다. 그리고 '얼음꽃'의 마지막 의미는... 아, 1번에서 벌써 얘기했군요.
사족같은 댓글:
히가시노 게이고의 <브루투스의 심장>이 사람을 조종하는 일은 맘대로 안된다는 쪽이었다면, <얼음꽃>은 사람의 감정과 행동을 대체로 예상할 수 있다는 편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대립하는 양자가 이를 각각 활용하는 구성은... 아, 더 얘기하면 안됩니다. '그의 한마디로 밝혀지는 충격적인 진실'류와는 거리가 있지만, <얼음꽃>의 전체적인 구성과 전개는 아주 훌륭합니다. 곰곰히 되새겨볼수록 더 그래요.
덤으로, 다시 찾아본 기억과 추억의 차이
"추억과 기억이란 게 어떻게 다른지 알아?" 사이카와는 담배를 끄면서 말했다.
"추억은 즐거웠던 일, 기억은 나빴던 일투성이죠."
"그렇지 않아. 나쁜 추억도 있고 즐거운 기억도 있어."
"그럼 뭐가 다르죠?"
"추억은 전부 기억할 수 있지만, 기억은 전부 추억할 수 없다는 거야."- <모든 것이 F가 된다>, 모리 히로시, pp.257-258
PS
오늘 아침 책을 덮은 <도착의 론도>, 상권 중간쯤에서 손을 놓은 <도구라마구라>에 대해서도 조만간 뭔가 적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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