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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倒敍]: [명사]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과는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기술하는 일. (Daum 국어사전)
<’도서관’은 한계가 없지만 주기적이다.> 만약 어떤 영원한 순례자가 어느 방향에서 시작했건 간에 도서관을 가로질렀다고 하자. 몇 세기 후에 그는 똑 같은 무질서(이 무질서도 반복되면 질서가 되리라, 신적인 질서) 속에서 똑 같은 책들이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리라. 나는 고독 속에서 이 아름다운 기다림으로 가슴이 설레고 있다. (바벨의 도서관, 픽션들, 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나는 추리하기 좋아하는 버릇을, 망상을 즐기는 버릇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 ○○○인 ×× ×××의 행방을 찾기 위해, 설령 그것이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일본 전국을, 아니 이 세상 끝까지라도 평생토록 찾아다니고픈 마음이다.그러나 ×××를 찾아내서 그가 범인이라고 한들, 설혹 아니라고 한들, 저마다 다른 의미에서 내 고통만 한층 더 깊어질 뿐일 것이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지도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그러나 ○○○ ○○○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타나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두려운 의혹은 날마다 더 깊어갈 뿐이다.
물론 이것은 소설가의 병적인 망상일 뿐이다. 그가 실제로 그랬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림자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타인에게 수수께끼를 풀게 할 게 아니라 스스로 진상을 밝히면 될 일이다.하지만 일단 의혹이 싹트기 시작하면 도무지 멈출 수가 없다. 그 끈적끈적한 의혹은 요물들의 습격을 알리는 북소리처럼 귓속을 울리며 점점 더 깊어져간다.“여기는 고향에서 수백 리 떨어진 머나먼 만주…….”연못 저편 숲 속에서는 모쿠바칸 극장의 악대가 연주하는 19세기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는 한낮의 꿈과 같은 정체 모를 망상이 회전목마처럼 덜커덩거리며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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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직장 동료가 그의 웹툰인 <이끼>를 추천하길래, 만화가의 이름이 기억나서 중고만화를 찾았더니 마침 한 질이 남아 있었다. 한 권에 300원, 배송비 포함 8,500원이 들었다. 새 책 두 권 값...
역시 최근에 번역판이 완결된 <라이드백>과 여러 모로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과거를 이야기하는 내용,
조직의 감정 없는 톱니바퀴로 굴러갈 수 없었던 주인공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거리를 고스란히 드러내기도 한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일까?)
사회는 잠재력을 가진 개인들이 욕망을 억누르며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조직의 일원으로 성숙하기를 바라지만, 그들은 시한폭탄이 될 수도 있다. 어디서 어떻게 폭발할 지 모르는 사람들, 그들과 부대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괴물같은 기계의 위험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고 있다.
공장에서 농성 중인 노동자와 경찰은 오늘도 대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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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는 <유리망치>로 낯이 익습니다. 여러 장르를 섭렵한다는데 이번에는 미스터리가 조금 가미된 SF입니다.)
그다지 특별하지 않아 보이는 한 소녀, 사키와 그녀의 친구들이 천 년 후의 세계에서 겪는 성장과 모험의 이야기라고 <신세계에서>의 줄거리를 요약한다면 그건 정말 너무한 일이죠. 하지만 그런 이야기의 축이 없었어도 저 같은 독자들이 두 권의 두꺼운 책을 밤새 손에서 떼지 못했을까 하는 건 좀 의문입니다. 참신한 설정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천 년 후의 평화롭지만 불안한 현실, 엄격히 통제되는 과거, 그리고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는 미래, 주력, 악귀와 업마, 요괴쥐, 유사미노시로…… 사실 이런 것들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독자의 관심을 끝까지 붙잡는 것은 사키라는 소녀가 이들 속에서 어른이 되어 가는, 다시 말하자면 그녀가 (독자와 함께) 세계의 진실을 이해해 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세계의 진실 중 몇 가지는 천 년 전에 살고 있는 저에게도 꽤 공감이 됩니다.
학교
학교는 아이들의 능력을 평가하고 사회에 위협이 될 수 있거나 낙오된 아이들을 도태시킵니다. 그들은 남은 아이들의 기억 속에서도 지워지지요. 합격한 아이들은 강력한 세뇌와 암시에 의해 체제에 순응하도록, 현실에 의문을 갖지 않도록 길들여집니다. 그러나 이런 걸러냄의 과정을 뚫고 기적적인 확률로 특별한 아이들이 나타나 세상을 놀라게 하지요. 우리는 그들을…… 저는 지금 <신세계에서>의 독후감을 쓰다가 어제 치러진 일제고사를 거부한 소수의 학생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천 년 후의 신세계에서도 학교는 이런 학생들을 ‘처분’하기 위한 수단을 고심하고 있더군요. ‘악귀’나 ‘업마’가 되어 세상을 파괴하는 것을 미리 막아야 하니까요. 악귀는 사이코패스의 다른 이름인 듯하지만, 업마는 무엇으로 이해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 삼십 년쯤 전이었다면 우리 나라에서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운동권’이 가장 가까운 의미를 가졌을 텐데, 지금은…… 뭐,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인간
신세계에서 초능력(주력)을 구사하는 인간은 콜로니를 이루어 사는 요괴쥐들을 여러 가지 작업에 부립니다. 별별 변이생물들이 다 있으니 인간과 말이 통하는 요괴쥐도 놀랍지는 않습니다. 대략 삼천년 전부터 ‘말하는 도구’로 노예를 다뤄온 인간들인데다 부락민의 전통이 있었던 일본이거든요. (우리 나라라고 다를 것도 없습니다.) 역사를 봐도 두 발로 걷고 말을 하고 민주주의를 외친다고 쉽게 인간이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주인공 사키는 누구보다 요괴쥐와 가까웠지만 – 목숨을 위협받은 만큼이나 덕분에 목숨을 건진 적도 많았죠 – 그 보답은 지극히 개인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인간과 짐승의 경계는 여전히 분명하니까요. 얼마 남지도 않은 인간들이 문명과 자유를 포기하면서까지 지키려고 하는 공동체는 그런 의미에서 내부로부터의 경계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깥 이류(異類)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주력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을 경계에 둘러쳐진 팔정표식처럼 말입니다.
희망
책을 읽은 후 제가 느끼는 ‘신세계’의 인상은 이 글의 제목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동시대의, 미래학자도 아닌 소설가가 그려낸 미래, 그것도 천 년 후의 세계에서 ‘예측’을 기대해선 안되지요. 그러나 우리는 역사가 어떤 면에서는 지루할 정도로 반복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에서 천 년 동안 변한 것들 – 초능력, 새로운 존재들 – 보다는 천 년 정도의 시간으로는 변하지 않을 거라고 작가가 생각한 것들에 관심을 둡니다. 주력을 가진 인간을 둘러싼 불신과 공포, 복수, 전쟁, 세대간의 갈등과 이해, 사람들 사이의 사랑과 질투, 희생과 헌신…… 이렇게 나열하자니 참 진부합니다만 이런 것들을 빼놓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엮어내기는 어려울 겁니다.
성인이 된 사키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이 맞물려 만들어내는 자신의 슬픈 이야기를 소설의 형식으로 남깁니다. 그녀가 신세계에서 (from the new world) 다음 세대를 위해 남기는 메시지 가운데 저는 인간만이 가져왔던 변치 않는, 그러나 근거 없는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이 세계를 더 좋게 바꿀 수 있다는 아주 오래된 믿음입니다. 인간은 언제까지 이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요?
재미있는, 읽기 편한 책입니다. 소년 소녀들과 함께 신세계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가는 모험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모험의 끝에는 언제나 예상치 못했던 결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폐허가 된 도쿄 지하에서의 마지막 모험은 RPG 게임마냥 흥미진진하지요.
그러나 읽고 나면 한동안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수만 년 동안 본질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은 인간이 어느 날 갑자기 초능력을 가질 거라 기대하지는 않지만, 인간들 중 소수는 이미 그 비슷한 힘을 충분히 남용하고 있는 현실이 더욱 답답해집니다.
지난 달에 일본 미스터리 문학 즐기기 카페에서 출간 이벤트를 열었고, 고맙게도 당첨되어 책을 얻었습니다. <내가 꿈꾸는 천 년 후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덧글로 달아서 참여하는 방식이었는데, 제 덧글을 부끄럽지만 여기 옮겨 두겠습니다. 그 때 저는 책의 내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과거 천 년이란 시간동안 인간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돌이켜 보면, 그리고 이 좁은 지구를 생각해 보면 저의 꿈은 몽상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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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올해 읽은 일본 추리소설 재활용 리뷰 (이건 상반기)
[albook|small|right|8992036671|width=100]<통곡>, 누쿠이 도쿠로
<통곡>에 대한 아내의 삐딱한 평
지금 보니 <통곡> 이벤트에 백플이 달려 있네요. 높은 인기예요.
사실 저도 참가할까 하다 별로 쓸 말이 없어서 - 도를 만나면 도망가기 바빠요 - 그만두고 사서 읽었죠.
아내가 먼저 읽었습니다. 상당히 빠른 진도를 보이던데 내용을 미리 알고싶지는 않아서 다 읽을 때까지 일부러 말도 안 걸었습니다. 중간쯤에서 술술 읽히기는 한데 사건 진행이 지루하다고 한마디 하더군요. 그리고 밤늦게 다 읽더니 피식 웃는 겁니다.
"좀 시시해. 나는 눈치챘어."
설마, 최근 여기서 읽은 <통곡>의 평들은 찬사 일색이었는데... 어쨌든 저도 이제 책을 잡아듭니다.
마쓰모토라는 이름의 정체모를 인물은 신흥 종교에 깊이 빠져들면서 자신의 가슴 속 구멍을 메워줄 빛을 찾으려 합니다.
한편, 유아 유괴살인사건이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수사는 답보 상태인 가운데, 수사1과 과장의 스트레스도 심해져 갑니다.
이야기는 이 두 사람을 교차시키며 진행됩니다. 이 소설의 문장은 군더더기가 없기에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전혀 비치지 않음에도 독자는 책을 내려 놓기 어렵습니다. 책의 남은 분량은 자꾸 줄어드는데 수사는 오리무중, 대체 어떤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엉뚱한 상상만 하게 됩니다.
449쪽, 두 사람의 이야기는 여기서 만나 결말을 짓습니다. 이거 참, 이 반전은 참신성보다는 오히려 그 '정교함'에 쓴웃음을 짓게 됩니다. 뒤집어 얘기하자면 너무나도 작위적인, 억지스럽다는 느낌. 불공정하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그러나 솔직한 감상은, 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되다 만 소설"
이란 평에 공감하게 되는군요. 평범한 독자들의 기대와는 다른 곳에서 끝이 났다고 할까요. 하긴 천인공노할 살인마일수록 추리소설에서 다루기는 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통곡>은 여러 가지 소재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유괴살인사건 자체를 제외하고도 신흥종교(<미륵의 손바닥>에서 본 적이 있고), 경찰 조직의 갈등(캐리어와 논캐리어 얘기는 너무 많이 들었어요), 매스컴의 보도경쟁(와이드 쇼 하면 <모방범>) 등은 일본 미스터리 독자에게는 꽤 익숙하죠. 이것들이 분위기나 상황을 그려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조금 더 흥미롭게 이야기 속으로 녹아들어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아요.
책에 대해 많은 기대를 갖고 계실 분들께는 조금 미안한 얘기만 늘어놓았군요. 우리 부부의 생각일 뿐이예요. ^^
<통곡>의 가장 큰 장점은 흡인력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460여 쪽을 읽어가면서 그렇게 지루한 부분은 없었던 걸로 기억해요. 때로는 미궁에 빠진 사건 때문에 골치아픈 형사의 입장에서, 때로는 구원을 찾아 사이비 교단에 빠져드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독자 역시 같이 고민하면서 사건을 안타깝게 맞이하게 되니까요. 실컷 안좋은 소리 하다가 뜬금없지만, 분명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스포일러:
'반전'하면 <살육에 이르는 병>과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들게 되는데, <통곡>의 반전은 그 둘 - '관계'와 '시간' - 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네요. 다른 종류의 연속살인사건으로 그려낼 수는 없었을까요? 트릭이 아까워서 말이죠.
번역하신 분이 개인적으로 남겨주신 댓글 중에서:
... 옮긴이가 이런 말 하는 게 우스운 경우라는 걸 알면서도, 통곡에 대해 많은 분들의 찬사에, '아니 그렇게 훌륭한 소설이었단 말인가' 하며 당혹스러워했었습니다. ...

<인사이트 밀>의 살인 도구에 대한 시시콜콜 잡담
<인사이트 밀>을 재미있게 읽으신 미스터리 팬들과 함께 나누고픈 잡담입니다.
이 작품의 여러 가지 살인 방법과 도구에는 나름의 설명과 출전이 같이 나와요. 순서대로,
독살 - 니트로벤젠 - 녹색 캡슐의 수수께끼 (존 딕슨 카)
교살 - 끈 - 구석의 노인 사건집 (오르치)
약살 - 니코틴 - X의 비극 (엘러리 퀸)
총살 - 22구경 공기총 - 제3의 총탄 (존 딕슨 카)
압살 - 천장 - 백발귀 (에도가와 란포)
사살 - 보우건 - 비숍살인사건 (반 다인)
격살 - 돌 - 두 개의 미소를 지닌 여인 (모리스 르블랑)
참살 - 손도끼 - 이누가미 일족 (요코미조 세이시)
이들 작품 중 몇 개나 읽어보셨나요? 제가 제대로 읽은 건 넷 밖에 없지만 책에서 맨 처음 나오는 얼룩끈에서부터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얼룩끈에서의 살인 도구는 워낙 유명한 '그것'이지, 부지깽이는 아니니까요. 홈즈를 모르는 미스터리 팬이 있어도 이상할 것 없는 현실이니 얼룩끈의 범인은 부지깽이를 휘둘러 살인을 저지른다는 큰 오해가 생길 수 있겠는걸요. 좀 더 살펴봅시다.
녹색 캡슐의 수수께끼는 번역이 되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작품 안에서 나중에 친절히 설명해 줍니다. 독은 니트로벤젠이 아니라 청산가리라고요.
구석의 노인 사건집의 끈에 이르면 이건 작가의 장난이란 생각이 들게 돼요. 제가 아는 한 그 끈은 절대로 목을 조르지 않거든요.
X의 비극은 어릴 적에 읽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네요. 어쨌든 여기서는 니코틴이 쓰이는 게 맞습니다.
제3의 총탄에서는 결국 22구경 공기총이 살인 흉기로 드러나지요.
백발귀는 못 읽어봤습니다. 짐작컨대 산 채로 무덤에 묻히는 거라면 압살은 대충 맞지만 그 도구는 상당히 다르군요.
비숍살인사건에 대해서도 작품 안에서 설명합니다. 보우건(석궁)이 아니라 보통 활(장궁)이 흉기로 쓰인다고요. 이 정도는 상황에 맞춘 변화라고 볼 수도 있죠.
두 개의 미소를 가진 여인에 대해서는 불행히도 전혀 모릅니다. 패스.
끝으로 이누가미 일족은 가장 최근에 읽은 소설이군요. 이건 "도끼가 실제로 사용되면, 거꾸로 세워 놓을 필요가 없어지잖아."라는 대사처럼, 이누가미 일족을 읽은 사람이라면 웃을 수밖에 없는 매칭이랍니다. 작가도 그걸 의도한 듯해요.
정리한다고 했지만 뒤죽박죽이군요. 각각의 도구는 미스터리 작품과 관련이 있기는 한데, 좀 엉뚱하게 연결한 것이 몇몇 있어요. 부지깽이, 끈, 그리고 도끼의 경우에는 확실히 작가의 의도, 또는 장난이 보여요. "독자들이여, 고전을 읽자"라는 메세지 같기도 하고. 그 효과가 있었는지 이누가미 일족이 어서 나오기를 제가 간절히 기다렸던 것은 이 소설 때문이기도 했어요.
십각관의 등장인물들(카, 오르치, 엘러리, 반 다인, 모리스 등)이 생각나기도 하는, 대담하고 즐거운 소설이었습니다.
[albook|small|right|8984013137|width=100][albook|small|right|8989722802|width=100]<이유>, 미야베 미유키
<유리 망치>, 기시 유스케
- 이 두 작품은 신간이 아니지만...
미스터리와 경제 - 이유, 유리망치
세계 경제가 흔들리고 있어요. 이유야 어쨌든 우리 나라 사정은 더 심각하구요.
일본 미스터리 독자 입장에서는, 판권료나 종이값 덕분에 책값이 더 오르겠거니 하는 걱정이 먼저군요.
경제와 장르문학의 상관관계는 어떨까요? 청년 실업이 늘수록 온라인게임이 인기인 현실과 비슷할까요, 아니면 오락소설 따위에 더 이상 쓸 돈은 없어질까요? 어쩐지 후자가 더 그럴 듯하네요.
그런 까닭인지, 경제 문제가 녹아 있는 미스터리 작품은 드물죠. 저는 <이유>와 <유리망치>가 생각나요.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는 일본의 부동산 버블 붕괴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90년대 초부터 시작된 일본의 경기 침체는 그 유명한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을 만들어 냈고, 작가는 그 혼란 속에 자리한 뉴시티 웨스트타워 2025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잔인하도록 담담하게 그리고 있지요.
전용면적 101.24제곱미터니까 분양면적은 대충 40평형인 셈인가요. 2025호의 분양가는 1억720만엔이었고, 분양받은 첫 주인은 전매를 목적으로 구입했다가 부동산이 폭락하자 1년 후 8250만엔에 매물로 내놓았고 결국 8120만엔에 팔았죠. 다음 주인은 1년 반 뒤에 7250만엔에 팔 수밖에 없었구요. 세번째 주인인 고이토 부부는 자기 돈 3500만엔에 나머지는 빌려서 이 집을 샀어요. 이 때가 1992년 봄이군요. 스포일러랄 것도 없이, 이 부부는 대출금을 갚지 못하고 집은 경매에 나오게 돼요. 그러나 비극은 이제 시작이죠. 이 숫자들은 요즘들어 더 실감이 나는군요.
<유리망치>의 2부는 아키라란 소년의 이야기예요. 1부의 밀실살인과는 전혀 이어지지 않는 이 고등학생의 험난한 인생은, 팔라듐(백금과 비슷한 귀금속의 일종) 선물거래에 손대기 시작한 아버지의 몰락에서 시작하지요. 투자 초반에 큰 이익을 냈다가 상황이 나빠지자 선물거래회사 직원은 아버지를 이렇게 꼬드겨요. "걱정 마세요. 조금만 참으면 됩니다. 시장은 반드시 반전됩니다. 지금까지의 손해는 열 배가 돼서 돌아옵니다." 그리고 결국 고리대금업자를 찾게 되죠. 그 뒤는 안봐도 비디오.
'물타기'가 뭔지 아시죠? 주가가 내려 손실이 났을 때 추가매입해서 반등시 수익을 기대하는 건데, 하락장에서 증권회사 직원이 하는 얘기가 늘 그렇죠. 바닥이 보인다고, 저가매수의 기회라고. 엊그제 은행에 갔는데 옆 창구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펀드를 해지하는 것 같더라구요. 집에 가셔서 부부싸움 같은 거 하지 마시고 그냥 깨끗이 잊어버리셨기를.
어쨌든 이것만 보면 미스터리 속에서 경제는 사람들에게 복수의 동기를 제공하는 역할 밖에 못하는 것 같아요. 돈이 아닌, 경제 현실을 담고 있는 다른 미스터리 작품들이 궁금해지네요. 제가 미스터리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albook|small|right|8925811235|width=100]<얼음꽃>, 아마노 세츠코
읽고 나서 생각하는 '얼음꽃'의 몇 가지 의미
<얼음꽃> 이벤트에 당첨되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출판사와 이 카페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1. 부서지기 쉬운
괜찮은 회사 사장의 조카인 주인공은 그 회사에서 일하는 남편과 함께 풍족하게 살고 있습니다. 안락한 저택에 보장된 미래, 그리고 가끔 대학 동창들과의 모임을 즐깁니다. 그러나 남편이 출장 중인 어느날, (언제나 그렇듯) 갑자기 걸려온 전화가 이런 일상을 바꿔놓습니다. 남편의 내연녀라는 전화 속 인물은 남편의 글씨가 적힌 '모자母子 건강 수첩'으로 주인공을 도발합니다.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 그러나 자신은 불임. 주인공은 이성을 잃고 맙니다.
2. 차가운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주인공의 행동은 냉정합니다. 남편은 이틀 뒤 돌아오는데다 약속들도 잡혀 입습니다. 적敵의 주소를 쉽게 알아낸 뒤, 남편의 열쇠꾸러미에서 수상한 열쇠를 확보, 완벽히 준비한 뒤 잠입합니다. 그리고 냉장고 속 주스에 농약을 탑니다. 문제는 그곳에 있던 두 사람의 사진과 모자수첩. 둘을 가지고 나오려던 그녀는 다시 생각해보고 제자리에 돌려 놓습니다. 있어야 할 것이 없다면 중요한 단서가 되리라 생각했겠죠. 알리바이도 나름 준비한 뒤, 주인공은 친구와의 약속시간에 정확히 나타납니다. 계획대로 그 여자는 죽었고, 이렇다할 증거도 남지 않았습니다.
3. 고독한
경찰 수사가 진행됩니다. 공교롭게도 죽은 여자는 주인공 남편의 회사 직원. (언제나 그렇듯) 한 형사의 직감이 주인공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 단서는 엉뚱하게도 '남편의 회사 책상 서랍'에서 발견된 죽은 여자와의 사진입니다. 수사 진행에 관심을 갖고 있던 주인공도 의혹을 품게 됩니다. 겨우 이런 여자에게 남편이? 자신의 복수는 제대로 이루어진 것인가? 그 와중에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과거의 사건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와도 상의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여기까지가 대략 1/3의 내용입니다. 중요한 몇가지 단서는 일부러 적지 않았습니다. ^^)
4. 날카로운
주인공은 이런 상황에 끌려다닐 인물이 아닙니다. 양친을 비행기 사고로 잃었을 때도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안흘린 아이였는걸요. 물론 이런 설정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없을만큼, 오직 하나의 목표물 - 남편과 X - 을 향한 그녀의 증오는 마치 비수와도 같습니다. 경시청의 민완 형사가 아무리 열심히 (그러나 조금 지루하게) 수사를 펼쳐도 여기엔 당할 수가 없네요. 이 소설의 백미는 주인공에 대한 형사들의 심문 장면인데, 그래서인지 용의자와 형사가 서로 바뀐 것 같답니다.
5. 마지막으로
반전이 있기는 합니다만 내용은 실질적으로 책의 'File 7: 재판' 부분에서 끝이 납니다. 재판이니 누가 이겼을까요? 궁금하시면 읽어보셔야죠. 이 책의 장점은 주인공의 심리가 드러나는 행동의 묘사에 있습니다. 그것은 애 아빠인 제가 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서 더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책을 손에서 뗄 수 없게 끌어가는 힘은 강한데 비해 기대했던 결말이 조금 완만합니다. 요즘은 낭떠러지 같은 결말이 유행이라서요. 여기서는 사건의 정체가 중반부터 조금씩 밝혀지다보니 독자에게 큰 충격은 못 줄 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궁금한, 아마도 추리소설로서 논쟁이 될 부분은 사람의 행동이 그렇게 정확하게 예측 가능하냐는 건데 (이런 의문이 두 번 들게 됩니다), 그 두 번 모두 작은, 그러나 치명적인 실수가 등장하니까 나름 공정합니다. 그리고 '얼음꽃'의 마지막 의미는... 아, 1번에서 벌써 얘기했군요.
사족같은 댓글:
히가시노 게이고의 <브루투스의 심장>이 사람을 조종하는 일은 맘대로 안된다는 쪽이었다면, <얼음꽃>은 사람의 감정과 행동을 대체로 예상할 수 있다는 편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대립하는 양자가 이를 각각 활용하는 구성은... 아, 더 얘기하면 안됩니다. '그의 한마디로 밝혀지는 충격적인 진실'류와는 거리가 있지만, <얼음꽃>의 전체적인 구성과 전개는 아주 훌륭합니다. 곰곰히 되새겨볼수록 더 그래요.
덤으로, 다시 찾아본 기억과 추억의 차이
"추억과 기억이란 게 어떻게 다른지 알아?" 사이카와는 담배를 끄면서 말했다.
"추억은 즐거웠던 일, 기억은 나빴던 일투성이죠."
"그렇지 않아. 나쁜 추억도 있고 즐거운 기억도 있어."
"그럼 뭐가 다르죠?"
"추억은 전부 기억할 수 있지만, 기억은 전부 추억할 수 없다는 거야."- <모든 것이 F가 된다>, 모리 히로시, pp.257-258
PS
오늘 아침 책을 덮은 <도착의 론도>, 상권 중간쯤에서 손을 놓은 <도구라마구라>에 대해서도 조만간 뭔가 적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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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미스터리의 냄새를 풍기는 도입부와 사건 발생까지는 즐겁게 지나갔는데...
이런, 책 분량의 3/4이 남았는데 범인이 나와버리면 어쩌라구요!
그러나 반전의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인 만큼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이제 문제는 살인의 동기입니다. <붉은 손가락>에서 만났던 가가 형사의 집요한 추리가 빛날 시간이죠.
책을 덮고 이야기를 되새겨 봅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요.
1. 추리소설에서 제목이 아주 큰 힌트가 될 수 있다는 것. 감히 얘기하건대, 이 살인의 동기는 '악의' 그 자체예요.
2. 물리적 트릭보다 심리적 트릭이 훨씬 어렵다는 것. "기계적인 밀실은 깨뜨릴 수 있어도 심리적인 밀실은 깨뜨리기 어렵다"(문신살인사건)는 말처럼, 다른 트릭은 눈치챌 수 있어도 선입견은 지우기 어려웠어요. 가가 형사와 마찬가지로 저에게도 '그것'은 이 소설 최고의 트릭이었습니다.
3. 이 소설이 다루는 사회적 이슈를 굳이 얘기하자면 '학교폭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폭력의 근원이 되는 악의('맘에 안든다')는 대체 무엇이길래 해결책을 찾기가 이렇게 어려운 걸까요?
솔 직히 얘기하자면 후반부의 탐문 케이스 1~10은 좀 지루했어요. 물론 독자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이른바 '반전'을 눈치채고 놀라게 되겠지만, 여러 인물들의 얘기가 산만했기 때문인지 결말도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는 충격이 약한 편이었구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예전에 읽은 <용의자 X의 헌신>이 비슷한 구성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 띠지에도 "<용의자 X의 헌신>을 능가하는 감동과 반전"이라고 써 놓았군요. 그래서 한 번 비교해 보았지요.
악의 (1996) | 용의자 X의 헌신 (2005) | |
탐정 | 가가 형사 | 유가와 교수 |
범인 | 초반에 밝혀짐 | 처음부터 밝힘 |
트릭 | 살해 동기 조작 | 알리바이 조작 |
트릭의 도구 | 범인의 수기 | 또다른 시체 |
고정관념 |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품 | 가해자-피해자의 구도 |
반전 |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 가해자-피해자의 새 구도 |
감동 코드 | 선의 | 헌신과 희생 |
대충 만든 표라 좀 엉성하지만, 어떤가요? 그럴듯하지 않나요?
전모가 이미 드러난 것 같은 사건을 두고 범인이 쳐 놓은 이중삼중의 덫을 풀어내는 형사와 탐정,
그 반대편에서 범행 자체가 아니라 더 중요한 무엇인가를 숨기려는 범인,
그리고 작가의 치밀한 트릭이 만들어낸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다가 끝에서야 의외의 진실(반전)에 놀라는 독자.
차이점으로는 악의적인 트릭과 헌신(희생)적인 트릭의 강한 대조를 발견할 수 있어요.
<악의>에서는 트릭과 감동 코드(이건 좀 좋은 표현이 아니지만요)가 서로 대척점에 자리잡고 있어서 그 감동이 덜했던 반면, <용의자 X의 헌신>에서는 그 둘이 한 인물 속에 통합된 까닭에 가슴 찡한 느낌이 더 강했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글 제목을 '대칭성'이라고 달았군요. 결론이라면, 일단 저는 둘 다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는 점을 미리 얘기해 두고요.
형 식적으로 두 작품은 공통의 구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차이를 보이는 부분도 실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대칭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어요. 약간의 불편한 점이 있는 <악의>란 제품을 업그레이드한 것이 <용의자 X의 헌신>이라고 할 수도 있을까요? (그러고 보면 이런 작품이 몇몇 있다고 하던데...)
어쨌든 히가시노 게이고의 인기 비결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 그리고 독자에 대한 철저한 서비스 정신. 작가만 보고 믿고 살 수 있는 책은 정말 드물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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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사회사를 연구한 저자답게 조선의 여인들이 몰래 읽던 소설 얘기도 재미있고, 중국에서 나온 왜곡된 역사서 하나 때문에 엉뚱하게 책쾌(서적중개상)들이 몰살당한 사건은 놀랍고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이 책은 다양한 영역에서 조선시대의 금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요즘 시국(국방부 '불온서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금서로 대표되는 새로운 사유에 대한 마녀사냥의 욕망이 지배하는 시대의 책 이야기는 즐거울 리가 없다. 내가 가장 가슴 아프게 읽었던 부분인 "한 영명한 왕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책 - 위험한 변화를 기록한 <심양장계>" 편은 더욱 그렇다.
소현세자 일행이 볼모로 청나라에 끌려가면서부터 8년만에 돌아올 때까지 본국에 보낸 일종의 보고서인 <심양장계>는, 세자가 외교적 역량을 쌓아가면서 왕의 재목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이면에서는 아버지 인조의 의심과 미움이 커져가는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세자는 돌아온 지 두 달만에 조선 역사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을 남기고 의문사하고, 인조는 세자빈과 자신의 손자인 그 아들들에게까지 사약을 내린다.
"비극으로 끝난 희망, 그것을 읽는 것만큼 가슴 벅찬 고통은 없을 것이다." - 193쪽
[albook|small|right|8936413058|width=100]저자의 이런 감정에 많은 독자들이 공감하리라. 결국 나는 충동적으로 최근 다시 번역 출간된 <심양장계 - 심양에서 온 편지>를 지르고야 말았다.
한 권으로는 내가 가진 책 중에서 가장 두껍다. 천 쪽이 넘는 이 편지들에는 또 수많은 주석이 달려 있어 소설마냥 쉽게 읽을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런 책이 번역되어 나온 것 자체가 고마울 뿐이니 틈나는대로 읽어보려 한다.
덧붙여,
예나 지금이나 우리 나라의 학문은 최신 이론의 수입에서 시작된다. (유행도 마찬가지인듯.) 어떤 이들이 보기에 조선시대는 번역이란 중간과정이 필요없었던, 바람직한 글로벌 환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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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스터리 문학 즐기기 카페에 '느린시간'이란 닉네임으로 남겼던 글과 댓글을 재활용하여, 올해 읽은 일본 추리소설 신간들에 대한 감상을 정리해 봅니다. (책을 읽은 분들만을 위한, 불친절하고 스포일러 가득한 리뷰랍니다.)
[albook|small|right|8925518651|width=100]<회랑정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대전으로 돌아오니 "0교시, 우열반 자율화" 같은 뉴스들만 기다리고 있네요.
회랑정 살인사건의 교훈도 그런 것이었지요. 부모를 잘 만나든지, 얼굴이라도 잘 생기든지.
그러나 우리 딸은 괜찮을 것 같아요. 아, 아닌가?
"내가 어때서!"
("벚꽃지는 계절에 엄마는 딸에게 헤드락을 거네"에서 - 비공개 설정)
[albook|small|right|8952750624|width=100]<외딴섬 퍼즐>, 아리스가와 아리스
에가미 선배는 직소 조각의 산을 파헤치더니 분류를 시작했다. (......) 조각을 맞추려고 하지는 않고 그저 뱀을 이루는 조각들을 모으고만 있다.
"흐음, 기본을 이해하고 있구먼."
의사는 에가미 선배의 작업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이 방법밖에 없지 않습니까?"
에가미 선배의 말에 소노베는 빙긋 웃었다.
<월광게임>보다 조금 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각 장의 제목 - 밀실 퍼즐, 자전거 퍼즐, 모아이 퍼즐, 자살 퍼즐, 직소 퍼즐 - 처럼 아기자기한 트릭들이 흥미로웠고, 풋풋한 주인공들의 청춘(!)도 남쪽 바다 작은 섬에 잘 어울렸습니다.
독자에 대한 도전을 마주하고 저는 솔직히 범인을 짐작하기 어려웠습니다. 머리가 굳은 건지, 지나치게 많은 힌트들에 집중력을 잃은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에가미 선배의 추리와 더불어 범인이 밝혀지고 나니 조금만 더 생각해볼 걸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뭐, 늘 그렇지만요.
이 소설의 특이한 점은, '범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만 논리적인 추리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밖의 수수께끼 - 범행의 동기나 방법, 밀실 트릭, 다잉 메시지 등 - 는 범인이 고백하기 전에는 추측만 가능한 것들입니다. 알찬 '퍼즐 북'을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좀 아쉬울 수도 있겠습니다만, 주인공 커플의 데이트와 보물찾기 같은 건 추리의 대상이 아니라도 언제나 재미있는 읽을거리니까 괜찮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대화는 책의 초반부에 나옵니다. 에가미 선배는 비슷한 방법으로 뱀이 아니라 사건을 이루는 힌트 조각들을 모아 범인을 맞춥니다. 그러나 '이 방법밖에 없다'는 그의 차가운 지성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범인을 도출해 내고,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결말을 이끌어 냅니다. 이번 사건에서는 궁지에 몰린 범인이 으레 저지르는 행동 - 범행을 부정하면서 오히려 탐정의 추리에 장단 맞추기 - 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슬프군요.
("<외딴섬 퍼즐>을 푸는 한 가지 방법, 그리고 번역 실수"에서)
[albook|small|right|8901083388|width=100]<제3의 시효>, 요코야마 히데오
최근에 <제3의 시효> 관련 글에서 소설의 내용이 만화책 <강력1반>의 2권으로 나와 있다는 얘길 듣고 검색해보니 새 책은 절판이고 중고는 때맞춰 한 질(1-4권) 있더군요. 사는김에 <절대미각 식탐정> 1-8권도 같이... (이건 절판은 아니지만 싼맛에)
<강력1반>은 눈을 뗄 수 없을만큼 흡인력 있는 스토리 + 깔끔한 성인만화 그림체입니다.
특히나 고독한 야수들이 모인 강력반 조직 내부의 갈등이 사건에 깔려 있어 더 흥미롭네요. 2권 "제3의 시효"는 결말이 여운을 남기고 있고, 1권 "침묵의 알리바이", 3권 "밀실의 구멍", 4권 "죄수의 딜레마" 모두 원작의 힘이 느껴집니다. 앞으로 요코야마 히데오의 강력1반 시리즈도 계속 출간된다죠?
다만 결말을 이렇게 다 알아버려서... 전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관심을 가져보겠습니다. ^^
("중고 만화 <강력1반>, <절대미각 식탐정>"에서)
[albook|small|right|8991684475|width=100]<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 히라야마 유메아키
며칠 전, 동네 서점에서 제목이 가물가물한 책이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횡축 메르카토르 도법의 이해> 비슷한 제목의 소설이 있나요?"
아저씨는 '도법의 이해'로 검색하시더니 고개를 젓고... (그게 뭔 지도책이여?)
알고보니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이었다죠.
고등학교 지리시간에 공부를 너무 많이 했나봅니다. 아직도 UTM을 기억하고 있다니...
결국 인터넷으로 사서 다 읽은 기념으로 고백합니다.
('한 마디' 게시판에서)
느린시간: "오퍼런트의 초상"은 이퀼리브리엄(영화) 같이 디스토피아를 다룬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데 제게는 그것이 <1984>였습니다. "끔찍한 열대"에서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연상하신 분들도 꽤 있겠죠?
(구름이님이 쓴 "히라야마 유메아키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의 댓글)
[albook|small|right|890108371X|width=100]<하얀 토끼가 도망친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의 세번째 단편 "비할바 없이 성스러운 순간"은 다잉메시지에 대한 탐구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다잉메시지가 나오죠. 이 글은 그 첫번째에 대한 사소한 정보와 감상입니다.
피해자의 강력한 소망을 담고 있는 첫번째 다잉메시지는 겐지 향(香) 기호인지라 우리 나라 독자로서는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는 위키 백과가 제일이죠. '香の図' 항목에 다음 기호 일람표가 나옵니다.
©Wikipedia
52가지 기호를 겐지이야기(源氏物語)의 권 제목들로 이름붙였다고 합니다.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 내용을 읽어보니, 아하! 이건 5가지 향기를 구별해내는 게임에서 답을 표시하는 방법 - 일종의 OMR 카드 기입법 - 이었군요.
그러니까, 출제자가 5가지 종류의 향목(香木)들 25개를 섞어서 5개를 골라냅니다. 그럼 참가자들은 순서대로 하나씩 향기를 맡고 서로 같은 것을 줄을 이어 표시하는 거죠. 하쓰네(初音)는 오른쪽부터 시작해서 2번과 4번이 같은 향이고, 3번과 5번도 같은 향이란 의미인 듯합니다. 13번 아카시(明石)는 5개 중 3,4번만 같다는 뜻이겠죠. 경우의 수를 따져보니 정확히 52가지가 있군요. 어쨌든 꽤나 호사스런 놀이인 건 분명합니다.
살인자를 표시하는 이 다잉메시지의 특이한 점이라면 전달의 대상(단 한사람)과 전달의 목적(복수!)인데 그런 이중적인 구조가 제게는 정말 참신했습니다. <월광게임>에서의 그 불량품 다잉메시지에 너무 실망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그래서 책 147쪽에 그려진 '아카시'가 (밟혔다는 구실로) '1011'로 보이게 꼬아 놓은 정도는 그냥 넘어가렵니다.
번거롭긴 했지만 이렇게 찾다 보니 이 단편이 조금 더 재밌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한가지 아쉬웠던 건 제가 아직 <X의 비극>을 읽지 않았다는 거죠. 이걸 어떻게 구해 본다?
(""비할 바 없이 성스러운 순간"의 다잉메시지 (스포 잔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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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구조물과 기괴한 생명체의 묘사는 여전히 압도적이다. BLAME!과 다른 점이라면 아직까진 '하늘'이 보인다는 사실 정도? 폭주하는 오염된 세상에서 주인공의 모험은 BLAME!의 연장선 혹은 그 반대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몇 가지 사소한 특징:
1.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의 등장 (특히 3권 표지!) - BLAME!에는 시보 주임 말고 그런 존재가 거의 없었던 걸로 기억.
2. 가끔씩 허무하게 처리되는(죽어버리는) 적 - 잔뜩 힘주고 나타나서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허탈한 경우들이... 디자인이 아깝지도 않나.
3. 유머 코드 - 예: "그냥 벌꿀은 별로라..."
그리고 전작만큼은 아니지만 화려하게 난무하는 설정에 맞춰 역시 이번에도 용어 사전이 등장했다. 일본어 위키를 Ratatosk님이 번역했는데, 몇 번을 읽었지만 빠뜨리기 쉬운 부분들을 채워넣고 복습하기에 좋다. 대부분 스포일러일 수밖에 없기도 하니까.
Ratatosk's Tree - 바이오메가 위키번역
PS. 작가의 단편 <아바라 Abara> 상하권도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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