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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25. 11:43
일본 미스터리 문학 즐기기 카페에 '느린시간'이란 닉네임으로 남겼던 글과 댓글을 재활용하여, 2009-2010년 8월까지 읽은 일본/한국 추리소설 중 몇 권의 감상을 정리해 봅니다.
재활용 리뷰는 계속됩니다.

*   *   *

문은아직닫혀있는데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이시모치 아사미 (살림,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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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 - 이 제목 참 근사하지요.

조만간 이벤트 당첨자 발표가 있을 거고 서평이나 독후감도 많이 올라올 테지만, 저 나름 이 책을 읽고 뭔가 색다른 재미를 느꼈으니 이것저것 적어 볼께요. (써 놓고 다시 보니 정말 산만하군요.)

1. 도서(倒敍) 미스터리
도서(圖書)와 혼동하여 '비블리오 미스터리'와 같은 용어라고 알고 계신 분이 있던데, 전혀 달라요.
도서[倒敍]: [명사] 역사적인 시간의 흐름과는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기술하는 일. (Daum 국어사전)
그러니까 도서(倒敍) 미스터리는 사건이 발견되고 수사와 추리를 거쳐 범인이 드러나는, 미스터리의 일반적인 서술 순서를 뒤집어 놓은 거죠. 범인이 누군지,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지가 이야기의 처음에 나오는 건데, 제가 읽은 일본 미스터리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브루투스의 심장>이 생각나네요. 그렇다면 단순히 범인은 누구냐!가 아닌 다른 수수께끼가 있어야 하겠죠.

이 책에서는 살인의 동기, 그리고 (동기와 밀접하게 연관된) 왜 밀실을 만들었는지? 덧붙여 탐정역의 인물과 범인의 관계가 궁금증을 더해가며 이야기를 이끌어 가요.

2. 밀실의 문
모순 형용인가요. 이 책의 밀실에는 너무도 존재감이 뚜렷한 문이 있어요. 대개의 밀실에서 문은 도끼로 부숴지지만 이 문은 그런 상투적인 역할에 만족하지 못하는 듯, 쉽게 열리지 않아요. 알고 보니 작은 틈이 있었더라, 또는 사실은 잠기지 않았더라 그런 식의 트릭도 거부하지요. 오랫만에 보는 제대로 된 - 제 역할을 충실히 하는 - 문이군요. 물론 범인이 '밖에서' 밀실을 만들 수 있었다는 점에서 완벽한 밀실의 문으로는 실격이지만요.

설계상의 결함으로 인해 신용카드 같은 걸 손잡이 옆 문틈에 끼워넣으면 간단히 풀리는 문이 학교에 있었는데, 저희들은 그걸 농담삼아 '카드키'라고 불렀죠.

3. 사회적 밀실
아직도 문이 안 열렸네? 두껍지 않은 분량이지만 책을 읽다가 이런 생각이 자주 들어요. 중간쯤 지나면 작가의 속셈이 비치기도 하고요. 후반부에 가면 밀실을 앞에 두고 우왕좌왕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좀 우스워요.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문짝이 귀하다고 부수지를 못하고, 이웃집 눈치보랴 창문도 못 깨고... 일본스럽지요.
또, 사람들의 관심을 돌려 문이 열리지 않게 하려고 범인이 좋은 와인을 내놓고 친구들이 환호하는 장면에서는 죽은 이가 참 불쌍해져요. 친구라는 것들이... 그나마 신경 써 주는 탐정이란 작자도 꿍꿍이속은 딴 데 있고 말이에요.

이런 사람들이 조용히 죽어가는 사회적 밀실 - 범죄를 사고로 은폐하는 밀실 - 은 아마 우리 주위에도 흔하게 있을 걸요.

4. 동창 모임
이 책에서처럼 흩어져 지내던 대학 동창들이 오랫만에 모인다면 저는 그 중에서 유카 -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귀엽고 무서운 처자 - 같은 후배를 꼭 다시 만나고 싶군요. 그녀의 논리적인 두뇌와 날카로운 직관은 선배들의 허세, 위선, 오류, 고집... 그런 것들을 얼마나 많이 간파하고 실망했을까요. 부끄럽겠지만 다시 만난다면 나 자신 좀 더 겸손히 그녀의 얘기를 들으려고 해요. (제가 뭐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지만,) 이 책의 그녀가 범인에게 바랐던 것도 선배의 그런 태도, 즉 완벽하게 대등한 관계였거든요.

이 부분은 책을 읽지 않으셨다면 이해가 안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

5. 두뇌 싸움
결국 밀실을 앞에 둔 두 인물의 두뇌 싸움인데요, 그게 또 어떻게 보면 사랑 싸움 같기도 해요. (밀고 당기고...) 범인과 탐정의 관계는 그런 걸까요? 엉뚱한 상상은 여기까지.

*   *   *

덧없는양들의축연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일본소설일반
지은이 요네자와 호노부 (북홀릭,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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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읽은 인사이트 밀에서도 이 작가, 요네자와 호노부는 유명한 추리소설들을 인용, 또는 이용하면서 재미난 이야기를 펼쳐냈습니다. 많은 독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고, 저도 독후감을 썼어요(<인사이트 밀>의 살인 도구에 대한 시시콜콜 잡담).

이 책, 덧없는 양들의 축연에도 그에 못지 않게 여러 작품들이 등장합니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독자들을 위한 코드일 수도 있고,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장치일 수도 있겠지요. 작가의 현학 취미일 수도 있고요.

어쨌든 이 책의 부제는 “The Babel Club Chronicle”입니다. ‘바벨의 모임’은 여기 실린 다섯 편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소재인 대학 독서 모임의 이름이니까 책이 자주 등장하는 게 이상할 건 없지요. 그 중에 제가 읽었거나 알고 있는 책, 아니면 읽고 싶은 책이 몇 권 나오니 반갑기도 해서 그것들이 이야기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간단히 정리하고 싶어졌습니다. 이 글은 덧없는 양들의 축연을 책에 대한 이야기로 읽은 저의 경험입니다.

집안에 변고가 생겨서

명문가의 영애와 하녀, 비밀스런 책읽기, 책의 내용으로 깔리는 복선, 그리고 반전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구조는 뒤에 실린 “타마노 이스즈의 명예”의 그것과 거의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두 작품 모두 재미있었다는 평이 많습니다. 이즈미 쿄카의 외과실, 요코미조 세이시의 밤산책, 맥베스, 알프스의 소녀, 이들 작품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것은 추리소설의 트릭을 파헤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즐거움을 줍니다.

외과실은 아주 짧은 이야기로 그 모티브가 장르 문학에서 종종 언급이 되는 것 같습니다. 시미즈 레이코의 만화, 비밀에도 나왔어요. 동명의 단편집이 번역되어 있던데,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북관의 죄인 / 산장비문

두 편 모두 별다른 책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함께 넘어갑니다. “북관의 죄인”은 책 대신 색이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산장비문”은 의외의 결말 말고는 그다지 끌리는 점이 저에게는 없었어요.

타마노 이스즈의 명예

우연히도 이 책을 읽기 전에 제가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책이 오랜만에 꺼낸 브라운 신부 전집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러나 브라운 신부 시리즈 중 하나인 “이즈리얼 가우의 명예”에서 제목을 빌렸지만 내용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체스터튼의 작품에 아래처럼 웃음을 자아내는 대목이 있었던가요?

“이건 중국 소설 중에서도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 중 하나랍니다.”란 이스즈의 말을 넙죽 받아 들여 읽게 된 책이 바로 『금병매』였다. 다음 날, 나는 새빨간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이스즈를 쫓아가 주먹으로 콩콩 때렸다. 이스즈는 웃으면서 “죄송해요, 죄송해요, 이 책을 드릴 테니 용서해 주세요.”라며 책 한 권을 내밀었다. 그렇게 읽게 된 책이 바타이유의 『고혹의 밤』이었다. 나는 완전히 토라져 사흘 동안 이스즈와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스즈는 마르키 드 사드의 작품도 준비해 두었던 모양이었지만, 내 반응을 보고 반성한 듯, 그것은 건네지 않았다.

저는 도로시 세이어즈를 읽지 못해 마빈 번터를 모르고 지브스 시리즈도 처음 들어봅니다만, 메이드나 집사가 요즘 일본에서 꽤 인기라는 건 압니다. 그런 인물들의 센스와 이즈리얼 가우의 고지식함이 결합되어 탄생한 하녀, 타마노 이스즈는 정말 매력적이에요.

그 밖에도 결말의 반전을 암시하는 밥 짓는 노래와 조식의 칠보시(“煮豆燃豆萁”)라든가 바벨의 모임에서 이스즈가 언급한 인물의 출전 등 파고들면 건질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습니다.

덧없는 양들의 만찬

스탠리 엘린의 특별요리를 읽은 독자들이 적지 않을 텐데 요파화, 불선양, 또는 (계륵편에 나오지만 너무 노골적이라 언급하지 않은 듯한) 양각양(兩脚羊)이라고도 불리는 아밀스탄 양으로 만든 요리를 요구하며 제리코의 유명한 그림인 “메두사 호의 뗏목”을 응접실에 걸어 놓는 주인공과 작가의 진짜 의도는 뭘까요. 그리고 아밀스탄 양의 가장 맛있는 부분은 왜 하필 거기일까요. 조금 더 나아가, 일본 미스터리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들의 모임이 회비를 연체한 현실주의자에 의해 덧없는 제물로 바쳐질 것을 상상하며 저는 또 다른 오싹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바벨의 모임은 계속됩니다. ‘나만의 공간이 아니라, 나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도서관’은 한계가 없지만 주기적이다.> 만약 어떤 영원한 순례자가 어느 방향에서 시작했건 간에 도서관을 가로질렀다고 하자. 몇 세기 후에 그는 똑 같은 무질서(이 무질서도 반복되면 질서가 되리라, 신적인 질서) 속에서 똑 같은 책들이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리라. 나는 고독 속에서 이 아름다운 기다림으로 가슴이 설레고 있다. (바벨의 도서관, 픽션들, 보르헤스, 황병하 옮김)

‘바벨’이란 단어에서 저는 “바벨의 도서관”을 떠올렸고, 인용된 그 마지막 문단은 “덧없는 양들의 만찬”에서 묘사된 바벨의 모임의 소멸과 부활에 잘 어울렸습니다. 이것이 작가의 의도를 충실히 따른 독서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벨의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서로 나누던 이야기도 아마 이런 종류의 확인과 설렘이지 않았을까요?

*   *   *

김유신의머리일까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차무진 (끌레마,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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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가고 싶어지는 책, <김유신의 머리일까?> (2010.7.24.)

오래 전에 경주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답사까진 아니었지만 이곳저곳 둘러보며 다녔는데, 감포 바닷가에서 누군가 홀로 제를 올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무속과는 무관하게 자란 젊은이의 눈에 소복을 입은 아낙네의 몸짓은 신비로우면서도 무섭게 보였습니다.
 
<김유신의 머리일까?>를 읽으면서 떠오른 기억입니다. 그 뒤에도 몇 번 경주를 방문했습니다만 특별한 느낌은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스산한 초겨울에 혼자 주인공(김법민)의 혼란스러운 방황의 궤적을 더듬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당장 떠날 수는 없으니 인터넷으로 배경이 되는 경주 서악동의 지도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1968년의 김유신묘 논쟁도 검색해서 읽어봅니다. 흔히들 ‘팩션’이라고 하는 소설의 매력은 역시 이런 데 있나 봅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이야기는 소화7년(1932년) 늦가을부터 다음해 봄까지 경주 선도산 아래 봉우마을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기이한 일들과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일들의 중심에는 각간묘(김인문 묘)의 터가 꺼지면서 발견된 생생한 모습의 머리뿐인 미라가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김유신의 머리일까요? 봉우마을의 두 가문 중 신라왕족의 후예인 유곡채의 둘째 아들 김법민은 일본인 귀족 친구 겐지와 함께 오사카에서 돌아와 이 수수께끼 풀이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고고학적 탐구에서 시작된 머리의 주인 찾기는, 장승이 보름마다 움직이고 경주 곳곳에서 도깨비불이 오르는 가운데 법민의 (형식적인) 아내가 목만 남은 시체로 발견되면서 삼국유사의 고사를 둘러싼 더 큰 미스터리로 번져갑니다.
 
(서악동 위성사진. 큰 길 서쪽에 다섯 기의 능(1-5호)이 있고, 길 건너 가까이 붙은 두 기의 능(6-7호)이 '김인문묘'라는 글자 아래 보인다. 5호가 무열왕릉, 7호가 각간묘.)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김유신이란 이름, 그리고 요즘 드라마를 통해 잘 알려진 신라 왕가의 이야기, 이렇듯 이 책의 역사적 배경은 친숙합니다만 실제로 책을 읽어나가는 과정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각간묘가 누구의 것인지에 대한 주장들과 더불어, 사건들을 설명하는 (일종의) 추리 역시 여러 인물들의 설이 서로 중층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순사부장 후즈키의 추리, 겐지의 추리, 박물관장 소우의 추리, 그리고 신문기자 성시원의 마지막 추리에서 이야기는 결말을 짓습니다만 독자는, 적어도 저는 이 과정이 조금 지루했습니다. 그러나 책을 놓지 못했던 이유는 이렇게 벌려놓은 이야기를 작가가 어떻게 마무리하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지만 김유신의 죽음에 대해 작가가 제시하는 설득력 있는 가설의 힘이 컸습니다. 작가도 후기에서 적었듯이 학문의 언어에 묶인 이야기들은 풀어주기만 한다면 스스로 독자들과 즐길 수 있으니까요.
 
<김유신의 머리일까?>에서는 작가의 노력과 열정이 느껴집니다. 비록 그것이 지나쳐 대중적인 장르소설의 도를 조금 넘었다 하더라도, 악의 정체와 결말이 약간은 상투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큰 흠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추리소설의 측면이 역사소설의 무게에 눌려버린 점은 아쉽습니다. 사건들의 단서는 많이 제시되지만 거기까지 집중해서 읽을 독자가 많지는 않을 듯합니다. 어쨌든 최근 뉴스에 벌써 영화화 얘기가 들리는 것을 보면 김유신의 죽음을 둘러싼 673년과 1930년대의 (어찌 보면 반복되는) 이 이야기는 아직도 세상에서 더 놀고 싶은가 봅니다. 신라 왕족과 장군들의 혼백이 머무는 서라벌이 요괴들이 떠돌던 헤이안쿄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겠죠.
 
*   *   *

시체를사는남자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공포/추리소설
지은이 우타노 쇼고 (한스미디어,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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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망상, 깊어가는 의혹 - 시체를 사는 남자의 도전과 실패 (2010.8.24.)

1.
사실 제가 이 소설, <시체를 사는 남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 대부분은 이미 손선영님이 “너무나 부러웠던, 란포에 대한 오마주. 우타노 쇼고<시체를 사는 남자>”에서 친절하게 짚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이 읽을 만한지 궁금하신 분들이나 책을 막 덮고 다른 사람들의 감상을 찾아보시는 분들은, 다시 말해 이 글을 꼭 읽겠다는 분들은, 먼저 손선영님의 서평을 봐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먼저 <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2>에 실린 “음울한 짐승”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나는 추리하기 좋아하는 버릇을, 망상을 즐기는 버릇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 ○○○인 ×× ×××의 행방을 찾기 위해, 설령 그것이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일본 전국을, 아니 이 세상 끝까지라도 평생토록 찾아다니고픈 마음이다.
그러나 ×××를 찾아내서 그가 범인이라고 한들, 설혹 아니라고 한들, 저마다 다른 의미에서 내 고통만 한층 더 깊어질 뿐일 것이다.
△△△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지도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그러나 ○○○ ○○○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타나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두려운 의혹날마다 더 깊어갈 뿐이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일부러 숨겼습니다. 여기와 다음 인용에서 강조는 제가 했습니다.
그리고 우타노 쇼고의 작품, <시체를 사는 남자>의 극중극인 <백골귀>의 마지막입니다.

물론 이것은 소설가의 병적인 망상일 뿐이다. 그가 실제로 그랬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림자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타인에게 수수께끼를 풀게 할 게 아니라 스스로 진상을 밝히면 될 일이다.
하지만 일단 의혹이 싹트기 시작하면 도무지 멈출 수가 없다. 그 끈적끈적한 의혹은 요물들의 습격을 알리는 북소리처럼 귓속을 울리며 점점 더 깊어져간다.
“여기는 고향에서 수백 리 떨어진 머나먼 만주…….”
연못 저편 숲 속에서는 모쿠바칸 극장의 악대가 연주하는 19세기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는 한낮의 꿈과 같은 정체 모를 망상이 회전목마처럼 덜커덩거리며 맴돌고 있다.
 
이 책의 다른 부분들처럼, 이 마지막 음악은 란포의 단편, “목마는 돌아간다”에서 따왔습니다.
어떤가요? 우타노 쇼고의 이 소설이 에도가와 란포의 오마쥬로 가득한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그 중에서도 백미는 역시 이 결말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음울한 짐승”의 모호한 결말은 발표 당시에도 논란이 되었다지요. 그 스타일이 이렇게 고풍스럽게(배경), 그러나 현대적으로(구성) 부활한 이 결말에서 저는 선배에 대한 지극한 존경, 다시 말해 거장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읽었습니다. 냉정한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도전은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신인임을 감안하더라도 실패에 가까웠지만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구요?

2.
저는 예전에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읽으셨다면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과 그 이유를 적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는 이벤트에 이렇게 덧글을 달았습니다:
"음울한 짐승"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특히 주인공이 자신의 추리를 의심하고 번민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탐정이란 사람들은 대부분 추리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판단을 자신있게 제시하는데, 사건의 관련자라면, 특히 음울한 짐승의 주인공 같은 처지라면 수많은 증거가 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더라도 확신을 가지기는 어려울 겁니다. 용의자와 밀회를 나누며 추리에 골몰하는 탐정도 참 대단합니다.

아쉽게도 <백골귀>에서 명목상 탐정 – 에도가와 란포 – 은 범인과 ‘그다지’ 깊은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이래서는 의혹이 끈적거리기만 할 뿐, 두렵기까지 하기에는 좀 모자라지요. 제가 아쉬웠던 부분은 아마 이런 이유에서였을 겁니다.

탐정의 추리하는 이성은 이미 범인을 지목했지만, 그의 병적인 망상은 깊어가는 의혹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황, 그것은 범죄의 어두운 면을 애써 무시하고 쌓아 올린 추리소설이란 장르의 본질적인 딜레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탐정은 대부분 범인과 심리적으로 격리되어 있지요. 소설 속에서 범인이란 어쩌면 탐정의 활약을 가장 애타게 기다리는, 그러나 그 기다림은 결국 배신당하는 그런 불행한 존재가 아닐런지요.

3.
이런저런 생각을 적다 보니 제목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손선영님은 서평에서 이렇게 제목을 해석했습니다: “호소미는 그것을 지적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요. 호소미의 시체를 사다시피해서 명성을 얻을 니시자키라는 뜻으로. 니시자키 너 역시 나를 사서 결국 유명해지는 것 아니냐라는.”

죽은 사람을 사서 무엇인가(새로운 삶, 명성)를 얻는다는 이런 식의 해석을 조금 더 확장한다면 이것은 어떨까요? 죽은 가가와 센키치와 살아있는 호소미, 죽은 호소미와 살아있는 니시자키, 그리고 죽은 에도가와 란포와 살아있는 우타노 쇼고. “시체를 사는 남자”란 제목에는 어쩌면 거장의 걸작에 기대어 작품을 쓴 신인 작가의 존경심과 도전 정신, 그리고 말 못할 부끄러움과 자존심까지 모두 뒤섞여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   *

그리고 독후감은 아니지만...


아래 진도리님의 글, “이렇게도 스포일러를 알게되다니 ㅜㅜ(밤산책 관련)”의 사연과 리플을 읽다가 해설에서의 의도하지 않은 스포일러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까 궁리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논리적 역설을 낳습니다. 제가 “본 작품이 아닌 다른 작품의 트릭을 언급하는 해설은 스포일러 방지가 불가능하다”라는 어이없는 명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형식적으로는 딱딱하겠지만 본질은 유머라고 생각하시며 읽어주세요.

진도리님은 B라는 작품의 해설에서 “B는 A의 트릭을 차용했다.”는 언급을 읽었습니다. 물론 이 해설은 서두에서 B의 스포일러를 포함한다고 미리 얘기했지만, 진도리님은 A를 아직 읽지 않았던 것입니다. (A가 트릭의 측면에서 대단히 유명하고 널리 알려진 작품이란 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국 진도리님은 사 놓기만 한 A를 읽을 의욕을 잃어버렸습니다. 트릭을 (그리고 결과적으로 범인까지) 알아버렸으니까요. 이런 비극은 B의 해설이 스포일러 방지를 충분히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B의 해설에서는 이런 일을 막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써야 했을까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종류의 스포일러 주의 문구입니다: “이 해설은 B와 A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두 작품을 아직 읽지 않은 독자는 어쩌고저쩌고.” 그러나 이 문장은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A와 B를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은 무심코 펼친 해설에서 ‘스포일러 주의’에 겁먹고 돌아서면서도 A와 B의 관련성만은 어쩔 수 없이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특별한 트릭이 사용된 A 또는 B를 이미 읽은 독자들은 이런 언급만으로도 A와 B의 관련성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결국 둘 중 하나만을 읽은 독자에게 이 스포일러 주의 문구는 거의 스포일러가 됩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 해설은 B와 A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B의 해설에서 이런 스포일러 주의를 접한 독자의 반응:
1.    A만 읽은 경우 – (일단 해설을 덮으며) 뜬금없이 A를 언급하다니, B의 트릭도 그거 아냐?
2.    B만 읽은 경우 – (일단 해설을 덮으며) 뜬금없이 A를 언급하다니, A의 트릭도 그거 아냐?
3.    A도 B도 안 읽은 경우 – (일단 해설을 덮으며) A와 B가 뭔가 관련이 있나봐. (나중에 A 또는 B를 읽고 나면 1, 2의 경우가 됩니다.)
4.    A와 B를 다 읽은 경우 – 무슨 이야기를 할지 뻔하지만 그래도 읽어 볼까.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작품해설에 눈이 가게 마련이므로 다른 작품의 트릭을 언급한다면 해설자에게는 스포일러 방지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정리한 것처럼 단순한 스포일러 주의는 그 자체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해설에서 다른 작품의 트릭을 언급하고 싶다면 ‘올바른’ 스포일러 주의는 이래야 합니다: “이 해설은 이 작품을 비롯한 여러 작품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스포일러를 절대 당하고 싶지 않은 독자라면 이 해설을 평생 읽을 수 없을 겁니다.

저는 스포일러에 둔감한 편이라 민감한 분들의 기분을 잘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스포일러를 당하고 싶지 않다면 해설을 읽지 않는 것이 답입니다. 끝으로, 진도리님과 그 글에 리플을 단 분들께 고마움과 (혹시 모를 불쾌함에 대한) 죄송함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