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9. 29. 23:13
[일상/독서]
"과학 소설의 상상력을 통해 내다본 인류의 미래"라는 (우리 나라에서 붙인 듯한)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재미라는 면에서 별로다. 미래상을 그린 소설(대부분 SF)들이 자주 언급되지만 웰즈의 타임머신을 빼고는 우리에게 대부분 낯선 작품들이다. 번역도 직역 위주라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서너번은 통독했고 지금도 펼칠 때마다 책 속에서 의미있는 통찰을 발견한다.
이 책은 미래를 그리지만 그것은 '예측'이라기보다는 '상상'에 가깝다. 그것도 "세계들 worlds"이란 표현처럼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다. 그러나 저자는 과학적 상상력의 구체적인 모습보다 그러한 상상(실현된다면 발전)의 길에서 우리가 내려야할 선택의 문제, 더 나아가서 과학 윤리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화려하고 정교한 과학적 미래 예측을 바란 독자는 실망하겠지만, 그것은 우리의 과학에서 무시할 수 없는 주제이다. 책의 내용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을 발췌, 정리하고 내 생각을 간단히 적어본다.
1. 이데올로기와 실용주의
노동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우리는
더 많은 학교와 더 적은 감옥,
더 많은 책과 더 적은 총,
......
그리고 더 좋은 본성을 도야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원한다.
- Samuel Gompers (미국의 노동운동가), 1893년
사무엘 곰퍼스는 미국의 노동자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는 무관심하며 높은 임금과 경제적 안정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에 반대해서 미국 노동운동의 실용주의 노선을 확립한 인물이다. 결국 유럽의 혁명적 이데올로기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귀착되었으나 미국의 노조는 실질적인 성과 - 경영자와의 계약 - 를 이루었다. 그러나 2차대전 후 상황은 바뀌었다. 유럽 사회는 비이데올로기적 기초 위에 노조의 역할과 활동을 재정립했으나 미국은 비현실적인 자유시장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다. 미국의 노조는 쇠퇴했다. 사회 정의가 없고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만 있는 사회에서는 총, 탐욕, 감옥이 반드시 승리한다.
물론 이러한 시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사회학을 공부한 나 역시 처음에는 저자의 주장에 쉽게 수긍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국제 현실과 우리 사회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자가 주장하는 '실용주의'는 설득력이 있다.
2. 과학기술과 윤리
"과학의 발전이 부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불평등을 강화하거나 또는 더 직접적으로 인간 삶의 파멸을 촉진시킨다면, 그 과학은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 - G.H. Hardy (수학자), "어느 수학자의 변명", 1940
얼핏 보면 번역이 잘못되었겠지 싶은 이 말은 우리 시대에 성공한 과학기술의 특징을 잘 짚고 있다. 기술은 부의 불평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IT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평등을 가져오는, 인간에게 적합한 기술은 어떤 것일까?
- 이 책이 제시하는 답: 오토바이, CAD-CAM 기술
정답은 위의 두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의 개발과 활용에 깔린 동지애, 자유, 평등이라는 이름의 윤리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미래가 진정한 의미에서 풍요롭기 위해서 우리는 새로운 과학기술이 가져올 결과를 주의깊게 생각해야 한다. 최근 각광받는 바이오 기술은 더욱더 그렇다.
3. 정치가와 기술자
저자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과학자로서의 경험과 고민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론은 간단하다. 원자력은 이데올로기의 호위 없이 다른 에너지와 공정하게 경쟁할 때만 살아남고 유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원자력 기술의 우월성은 비교, 검증되기보다는 주장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원전 폐기물 처리시설과 관련된 사회적 비용을 고려할 때, 과연 원자력이 다른 에너지보다 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렇듯 이데올로기 또는 정치적 이유에서 추진된 기술의 예로 영국의 비행선 R101의 실패 사례가 제시된다. 기술은 기술자들의 경쟁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 정치가와 기술자의 차이에 대한 저자의 통찰은 인용할만하다:
"정치 문화에서 지도자들은 <내가 모든 일에 책임을 진다>라고 말함으로써 존경을 받는다. 기술 문화는 다르다. 기술자들은 <안전이 최우선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존경을 받는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경부운하를 대선공약으로 내세웠다. 나는 자세한 사업 계획을 찾아서 읽고 지도를 통해 해당 지역의 지형을 살펴보았다. 부디 공정한 비용-편익 계산을 거쳐 정책을 결정했으면 좋겠다. 결론을 미리 내놓고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지겠다"는 식으로 나간다면 그것의 결과는 분명하다.
이 책은 1995년의 강의 내용을 엮은 것이다. 저자의 상상은 일상생활로 파고든 인터넷을 포함하지는 못했지만 생물학과 유전공학의 발전 쪽으로는 깊이 파고 들어간다. 일 년 뒤를 예측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앞으로 천 년, 만 년 뒤에 우리가 어떤 모습,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를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다음 천 년에서 가장 심각한 갈등은 생물학적인 싸움이 될 것이다. 이 생물학적 싸움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여야 하는가에 대해 다른 개념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일어날 것이다."
'일상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쟁과 삶 - 무거운 주제의 감동적인 만화책 몇 권 (1) | 2006.03.21 |
---|---|
보노보노 (3) | 2005.09.30 |
내가 읽은 일본 추리소설 (3) | 2005.09.08 |
서울 다녀오면서 서점에 들러... (2) | 2004.07.01 |
SF를 읽고싶다. (3) | 2004.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