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book|small|right|8990048524|]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Why Life Speeds Up As You Get Older, 다우베 드라이스마, 2001
10대, 20대에는 일년이 참 길게 느껴진다. 반면 나이가 들수록 지난 한 해가 어떻게 그리 금방 지나가버렸는지 놀랄 때가 많다. 이 책은 그 의문에 대답하기 위해 자전적 기억(autobiographical memory)의 본질을 심리학의 역사 속에서 탐구한다.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난 젊은 시절은 떠올릴 기억이 별로 없는 노년보다 느리게 느껴진다. (회상 효과) 그리고 젊은이의 생체시계는 대개 노인의 생체시계보다 빨리 움직인다. (생리적 시계) 이 두가지 이론은 그 의문에 대한 불완전한 답이다. 그러나 이 책은 시간과 기억에 대한 그 이상의 수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망각'이란 제목의 장에서는 기억상실증의 진행을 묘사하면서 어떤 할머니가 이미 세상을 떠난 남편에게 쓴 편지가 소개된다. 1분 전에 자기가 쓴 문장도 기억하지 못해 같은 말이 반복되는, 사실인지 모를 과거의 조각들만이 나열된.
작년 가을에 발표차 폴란드에 가는 길에 이 책을 사서 푹 빠져 읽었다. 그리고 오늘, 다른 한 권의 소설을 다 읽은 다음, 책장에서 다시 꺼내 펼친다. 이런 대목이 있다: 노인성 치매 환자가 기억을 잃어버릴 때는, 가장 최근의 기억이 가장 먼저 사라지고 가장 오래된 기억이 가장 마지막에 사라진다...
[albook|small|right|895274246X|]스몰 월드 Small World, 마틴 수터, 1997
치매: 정상적이던 지능이 대뇌의 질환 때문에 저하된 것
알츠하이머 병: 노인성 치매의 가장 흔한 원인, 대뇌의 신경세포가 변성, 사멸하는 질환
이 소설은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한 남자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의 세상이 변해온, 그리고 변해가는 과정을 다룬 일종의 추리소설이다. 주인공은 알츠하이머 병의 진행으로 기억을 잃어가며 일상적인 행동마저 어려워진다. 그럴수록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은 혼란스러운 형태로 드러나며 의문은 깊어진다.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이로 돌아간 그가 무서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병의 진행을 막으려는 노력은 성공할 수 있을까?
비록 추리물로서의 긴장감이 덜하다 하더라도 이 이야기는 살인사건이 아닌 한 사람의 기억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색다른 즐거움과 긴장을 준다. 무엇보다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주인공의 행동은 너무나 현실감 있게 묘사되어 있어 독자의 안타까움을 더한다.
나는 이 책을 몇 달 전에 인터넷 서점에서 '덤으로' 받았다. 2005년에 번역되어 나왔으나 그리 잘 팔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최근까지 손도 대지 않다가 며칠 전에 펴 들었다. 잠자리에서 읽을 책이 다 떨어진 까닭이다. 그런데 내가 언제나 마음에 두고 있는 생각의 실마리 - 시간과 기억 - 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되어 엮일 줄이야. 덕분에 '나이가 들수록...'까지 보태어 이렇게 감상을 적는다.
덧붙여 잡담...
다우베 드라이스마의 책에는 기억의 은유로 활동사진(영화)을 사용하여, '기억은 왜 거꾸로 돌리기가 안 되는가'하는 의문을 탐구하는 내용이 있다. 우리의 기억은 과거 어디로든 자유롭게 오갈 수 있지만, 제대로 보려면 반드시 시간 순서대로 돌려야 한다는 것. 흥미로운 사실은 요즘의 디지털 동영상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재생된다는 점이다.
디지털 동영상은 프레임frame이라 불리는 연속되는 장면들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용량을 줄이기 위해 데이터 압축이 필요한데, 각각의 프레임은 하나의 JPEG 그림 파일처럼 압축해서 저장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이어지는 각 프레임들 사이에서도 이른바 시간적 압축이 가능한데, 그림으로 보자.
동영상 압축 기술이 인간의 기억 방식을 본떴다는 이 주장은 검증하기가 곤란할 것 같다.
'일상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커트 보네거트의 사망을 슬퍼하며... (0) | 2007.04.18 |
---|---|
일본 고전 추리소설의 재미 - <문신살인사건>과 나루토 (1) | 2007.04.01 |
<시티즌 빈스>를 읽고 - 투표를 할 수 있다는 것 (0) | 2007.03.13 |
반전(反轉)만을 기다리는 독서는 이제 그만... <살육에 이르는 병> (3) | 2007.03.12 |
재미있는, 그러나 읽기 어려운 소설 - 미국의 송어낚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1) | 2007.01.26 |
[albook|small|right|8984013188|height=150]약한 몸살을 핑계삼아 누워서 책만 읽고 있다.
시티즌 빈스 Citizen Vince, 제스 월터, 2005
집 근처 서점에서 가볍게 사 들고 온 책. 영림 카디널에서 나온 블랙캣 시리즈 최근작이고 2006년 미국추리작가협회상(에드거 상)을 받았다니, 요즘 일본 추리소설에 편중된 독서 경향을 좀 바꿔볼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읽는 중간에 도착한 "살육에 이르는 병"에 결국 순서를 뺐기고 말았지만.
미국 추리소설은 엘러리 퀸 말고는 잘 모른다. 재작년 전에 읽었던 "부활하는 남자들"이 기억나는데, (부패한) 경찰과 갱은 미국 대중소설의 필수요소인가 싶다. 그러나 이 책, 빈스라는 사람의 파란만장한 일주일을 다룬 이 이야기는 거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 생뚱맞게도, 민주주의.
1980년 10월, 주인공은 쫓기는 와중에서도 며칠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찾아나간다. 중죄를 저지르면 미국에선 두 가지 권리를 잃게 된다고 한다. 총기 소지권과 투표권. 그러나 사람들에게 총은 너무나도 구하기 쉽고, 투표는 관심조차 없는 일이다. 뻔한 과거와 증인보호 프로그램 덕분에 생전 처음 투표권을 갖게된 시민 빈스. 어쩌면 이 소설은 평범한(?) 시민의 투표를 방해하는 온갖 것들의 음모를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1980년의 미국 대선은 재선에 도전하는 카터와 레이건의 대결이었다. 작가가 중간에 두 진영의 모습을 묘사하는 부분은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정치와 민주주의 (그리고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관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권력을 잡으면 부랑자와 매춘부들을 없애버리겠다면서도 뒷골목 인생들에게 한 표를 부탁하는 것, 전혀 모르는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을 나의 미래를 위해 선택하는 것.
이런저런 이유로 카터 전 대통령에 대해 좀 관심이 생겼다. 아니, 호감이 생겼다.
"문제는 바로 이겁니다. 각하께서는 국민들의 약점을 떠올리게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레이건을 원했다.
"사람들이 보스에게 원하는 건 딱 한 가지야. 그게 뭔지 알아? 바로 겁을 내지 않는 거야. (중략) 사람들이 두 번째로 원하는 건 머리카락이야. 겁쟁이나 대머리는 대통령이 될 수 없어."
추리소설의 결말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지만, 설마 레이건이 이긴다는 얘기도 못하는 건 아니겠지? ^^;
'일상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 고전 추리소설의 재미 - <문신살인사건>과 나루토 (1) | 2007.04.01 |
---|---|
시간과 기억 - <스몰 월드> (0) | 2007.03.21 |
반전(反轉)만을 기다리는 독서는 이제 그만... <살육에 이르는 병> (3) | 2007.03.12 |
재미있는, 그러나 읽기 어려운 소설 - 미국의 송어낚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1) | 2007.01.26 |
내맘대로 일본 추리소설 리뷰 2 (1) | 2007.01.23 |
[albook|small|right|8952748123|height=150]어제 오후에 책을 펼쳐 밤 깊은 시각에 덮었습니다. 원래 속독을 하는 편이나 중간중간에 여러번 다시 읽느라 오래 걸렸습니다.
살육에 이르는 병, 아비코 다케마루, 1992
이 카페에서 처음 소개글을 접하고, 저 역시 '충격적인 결말'을 기대하며 책이 도착하기 며칠 전부터 목이 빠져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기다림이었을까요? 해설에서 언급된, '서술 트릭이 가져다주는 세계가 붕괴하는 듯한 착각'에 이르기 전에, 트릭의 구조를 알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반전이 기막히다는 이야기에 대해 그 결말을 미리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독자는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가며 수수께끼를 풀어보려 하지요. 범인을 포함한 모든(?) 결말이 책의 첫 머리에 '에필로그(!)'로 제시된 이 책은 더욱 그럴 것입니다. 대체 무슨 반전이 있는 것일까?
최근 일본 신본격 추리소설을 몇 권 읽으며 감탄, 또는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기에 제가 더 심하게 텍스트를 파고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묘사의 미묘한 이질감, 약간 의아한 어휘 선택 등... 물론 그 중에는 단순한 함정도 있고, 중요한 힌트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7장 정도에 이르러 모순점이 너무 심해지자 결국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과연, 역시 가장 결정적인 힌트는 아래 뚜벅이님이 다른 글의 댓글에서 언급하신, '30쪽 이전에서 찾을 수 있다'는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의 독서는, 글쎄요, 자신에게 후회스러웠다고나 할까요. 차라리 그냥 편히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그러나 이어지는 가사이 기요시의 작품 해설은 그런 아쉬움을 어느 정도 보상해줄 만큼 훌륭했습니다. 결국은 공개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해질 트릭과 반전이 작품의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책을 덮고 나서도 남아있는 이 작품의 강한 인상은, (저에게는) 실패한 반전의 충격도, 잔인한 묘사도 아니라,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현대의 사회, 가정, 인간의 단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몽매한 평자로부터 자주 '몰사회적'이란 비난을 받은 아야츠지 이후의 현대 본격 작품에, 실제로는 80년대라는 시대의 병리적 징후가 필연적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해설의 이 문장은 자칫 놓치기 쉬운 이 작품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더불어 전혀 현실적이지 못한 일군의 신본격 추리물들에 대한 저의 편견을 많이 누그러뜨리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나올 신본격, 아니 모든 추리 소설들이 그 시대적 가치를 온전히 평가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P.S. 30쪽 안에 있다는 그 힌트, 번역하신 분의 고심이 엿보입니다. 일본 독자들은 그냥 단순한 오자로 봐 넘겼을까요?
'일상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간과 기억 - <스몰 월드> (0) | 2007.03.21 |
---|---|
<시티즌 빈스>를 읽고 - 투표를 할 수 있다는 것 (0) | 2007.03.13 |
재미있는, 그러나 읽기 어려운 소설 - 미국의 송어낚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1) | 2007.01.26 |
내맘대로 일본 추리소설 리뷰 2 (1) | 2007.01.23 |
새해 첫 주, 책에 파묻혀 (0) | 2007.01.09 |
제목 그대로, 재미있지만 읽기 어려운 소설 두 권을 소개합니다.
재밌다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읽기 어렵다는 (그래서 잘 팔리지 않는다는) 점에는 사람들이 대부분 동의합니다. ^^;
미국의 송어낚시, 리처드 브라우티건, 1967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다카하시 겐이치로, 1988
시간 1
"미국의 송어낚시"는 93, 94년 경, 제가 대학생일 때 산 책입니다. 종이가 많이 바랬습니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는 작년 7월경에 사고 최근에야 읽기 시작해서 아직 반도 못읽었습니다.
시간 2
미국의 송어낚시 - 1991년 3월 25일 초판 인쇄, 1991년 4월 20일 1쇄 발행
어떤 분 曰, "책을 좋아하는 친구에게는 보여주지도 말아야 한다"는 초판본을 갖고 있습니다. 2002년과 최근에 새 판이 나왔네요.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초판 1쇄 발행 1995년 3월 15일, 재판 1쇄 발행 2005년 7월 7일
우리 나라에선 10년동안 각계 각층의 팬들이 절판된 이 책을 구하고 싶어했습니다.
오해
"미국의 송어낚시"는 가끔 서점의 낚시 코너에서 찾을 수 있었답니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가 많은 책방에서 스포츠 코너에 있었다는 사실을 작가도 알고 있네요.
인용
벤자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읽고 미국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사람은 카프카였던가…….
'건전하고 낙천적이기 때문에 나는 미국인들이 좋다'라고 말한 카프카 말이다.
작가
1974년 페이퍼백판
[wp.ja:高橋源一郎]다카하시 겐이치로[/wp] - 대학 재학중 학생운동에 참가해 체포된 경력이 있고, 이로 인해 극심한 실어증을 경험. 소설을 쓰기 전 70년대에는 육체노동을 했습니다.
평가
미국의 송어낚시 - 포스트모더니즘, 현대의 목가, 생태주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대한 비평, 언어 표현의 해체와 재구축
감상
인터넷 식으로 말하자면, "제목은 훼이크!"
그렇지만 읽고 나면 결국 그 제목만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에 그것이 '없기' 때문일까요.
"미국의 송어낚시"는, 제게 평생 절대로 버리지 않을 책 중 하나입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펴보지도 않았지만 말입니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역시 그렇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내용이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글을 쓰면서 인터넷 검색을 하다보니 이 두 책에 대해 저랑 비슷한 느낌을 가지신 분이 있었습니다. 확실히 이들은 서로 닮았습니다.
http://readme.kr/blog/archives/000581.html
두 책의 알라딘 링크를 남겨둡니다.
[albook|small|left|8992036248|height=150][albook|small|left|8901050145|height=150]
'일상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티즌 빈스>를 읽고 - 투표를 할 수 있다는 것 (0) | 2007.03.13 |
---|---|
반전(反轉)만을 기다리는 독서는 이제 그만... <살육에 이르는 병> (3) | 2007.03.12 |
내맘대로 일본 추리소설 리뷰 2 (1) | 2007.01.23 |
새해 첫 주, 책에 파묻혀 (0) | 2007.01.09 |
내가 만화를 좋아하는 이유 (1) | 2006.08.27 |
전에 감상을 적었던 작품들은 고전 본격물과 사회파를 일부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요즘엔 최근 많이 번역되어 나오는, 지금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었습니다.
1. 고전/본격
[albook|small-gif|left|894970241X|][albook|small|left|8952746791|height=150][albook|small|left|895274781X|height=150]
외딴섬 악마, 에도가와 란포
란포의 취향은 서커스에서 시작해 인체변형을 거쳐 결국 동굴탐험으로 끝나더라구요. "음울한 짐승"에 비해 너무 통속적인 느낌.
팔묘촌(八つ墓村), 요코미조 세이시
만화 "너버스 브레이크다운"의 에피소드, '아스하카 촌(明日墓村)'의 첫 장을 보면 탐정 미와가 머리에 손전등을 매고 일본도와 총을 들고 있죠. 팔묘촌 옛 살인마의 아이템이네요.
참고로, 최고(!)의 추리만화인 너버스 브레이크다운의 모든 에피소드 제목은 모두 유명 추리소설 제목의 패러디입니다. 작가에게 경의를, 그리고 그걸 모두 조사하신 분께도 감사를.
http://www.h4.dion.ne.jp/~fukuda/nervous.htm
점성술 살인사건, 시마다 소지
이건 전에 따로 얘기했지요. 신본격으로의 다리라고 할 수 있겠네요.
2. 신본격
그러고 보니 신본격이랄 수 있는 작품도 꽤 읽었습니다. 모르고 읽었지만...
[albook|small|left|8990785901|height=150][albook|small|left|8990785987|height=150][albook|small|left|8959750220|height=150][albook|small|left|8901061988|height=150][albook|small|left|8937831236|height=150][albook|small|left|8990785871|height=150][albook|small|left|895298238X|height=150]
십각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
'관' 시리즈의 시작이자 신본격의 선언문.
"(전략) 역시 미스터리에 걸맞은 것은 명탐정, 대저택, 괴이한 사람들, 피비린내나는 참극, 불가능 범죄의 실현, 깜짝 놀랄 트릭……, 이런 가공의 이야기가 좋아. 요컨대 그 세계 속에서 즐길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거지. 단, 지적으로 말씀이야.""경애하는 모든 선배들께 바친다"는 헌사가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핵심은 서술 트릭이랄 수 있겠는데, 유심히 읽어보면 결코 반칙이 아닙니다. 평가가 많이 갈린다지만 저는 추천!
시계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
'폭풍의 산장' 패턴의 아~주 극단적 형태. 시공간의 고립과 왜곡. 더 이상은 발설 불가.
설정이 아무리 비현실적이라 해도 그것이 만들어낸 흡인력은 놀랍습니다. 두꺼운 분량이지만 밤을 새웠던 기억이...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아무리 주를 달고 변명을 해도 이건 서술 트릭이 아냐! 재미는 있지만 다시 읽긴 무리.
작가는 신본격 1세대인데 이 작품은 사회적인 XX문제를 다루었으니 사회파 소설인가?
(까발리기를 피하려니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어야지...)
여섯번째 사요코, 온다 리쿠
고등학생들의 비밀 이야기는 추리소설로 적당하지 않은지, 장르가 좀 애매해요. 갑자기 토네이도가 몰아치는 장면부터는 귀신 얘기로 흘러가는 느낌. 신본격 작가로서의 데뷔작 치고는 조금 아리송.
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할머니 옛날 얘기같은 에피소드 넷. 그러나 각각이 오랫동안 곱씹을 수 있는 모티브가 되는, 장르소설이지만 순문학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그때문인지 아직 네번째 에피소드는 못읽었어요. ^^;
모든 것이 F가 된다, 모리 히로시
프로그래밍을 좀 해봤기에 재미가 더한 작품. 다만 탐정의 조수 캐릭터가 완전 에러.
작가가 공대 교수라지만 <오브젝트 지향 시스템 분석 설계 입문>을 권두에 인용하신 건 너무하지 않나요?
잘린머리 사이클, 니시오 이신
트릭, 트릭, 트릭,…… 천재들끼리 재밌게 노는 건 좋은데, 이렇게 마구 결말을 꼬아대면 평범한 독자들은 어쩌라구요.
법칙 하나: (일본에서) 최고의 프로그래머라면 OS쯤은 자기가 만들어 쓴다.
3. 사회파
뭉뚱그려 사회파라고 하지만 이 작가들은 다 제각각인듯...
[albook|small|left|8989722802|height=150][albook|small|left|8954601863|height=150][albook|small|left|8991931138|height=150][albook|small|left|8982738657|height=150][albook|small|left|8984013137|height=150][albook|small|left|8991207456|height=150][albook|small|left|8972753696|height=150]
이유, 미야베 미유키
부동산 버블 붕괴와 법원 경매(제가 속이 쓰리네요, 쩝.)를 가지고 미야베 미유키 식으로 쓴다면 이 소설이 됩니다.
모방범 1-3, 미야베 미유키
와이드쇼와 옐로 저널리즘을 가지고 미야베 미유키 식으로 (구구절절하게) 쓴다면 이 소설 1-3권이 됩니다.
마술은 속삭인다, 미야베 미유키
최면술과 서브리미널 광고기법을 가지고 미야베 미유키 식으로 쓴다면 이 소설이 됩니다.
이 작가는 방대한 소재를 모아 가족애를 버무려 훌륭한 작품을 쓰긴 하는데, 그 독특한 스타일이 이제는 식상해요.
유리망치, 기시 유스케
건축공학, 재료공학, 로봇공학, 인터넷 상거래가 결합된 하이테크 트릭의 완전범죄. 그러나 그 핵심인 의료 머신 루피나스 V는 왠지 좀 개그스러운데, 우리 동네 피부과 광고에 루미니스 레이저 시술법이 나와서 그런가... 1부 탐정 관점의 본격물, 2부 범인 관점의 사회파로 구성되는, 조금은 전형적인 구성.
13계단, 다카노 가즈아키
이 작품은 신본격이니 사회파니 하는 꼬리표가 무색합니다. 추리소설의 재미와 더불어 주제의식을 놓치지 않는 묵직한 전개가 좋아요. 쉽게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는, 맘에 드는 작품.
호숫가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 사교육 문제를 가지고 이렇게 아기자기하면서도 강렬한 이야기를 만들기는 쉬운 일이 아니죠. 미야베 미유키라면 등장하는 가족들의 인생 얘기에 아마도 몇 권짜리 대작을 쓰지 않았을까.
용의자 X의 헌신, 히가시노 게이고
문제를 만드는 것과 그 문제를 푸는 것, 어떤 쪽이 더 어려운지 생각해 볼까요. 그런데 그 전에 왜 문제를 만들고 또 풀어야 하나요? 이 작품의 알리바이 트릭은 정말 신선하지만, 누구 말마따나 이 소설은 진정한 로맨스입니다.
4. 기타

아임 소리 마마, 기리노 나쓰오
우리 부부 공통 감상: 범죄자든 탐정이든 '괜찮은' 인물이 없다면 읽을만한 얘기가 못 된다.
돌속의 거미, 아사구레 미쓰후미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아도, 기법이 참신해도, 일단 재미가 없어요!
월관의 살인 상·하, 아야츠지 유키토 글/사사키 노리코 그림
철광(鐵狂, 철도 매니아)에게 바치는 만화 작품. 언밸런스한 순정만화 그림체가 어울려서, 사람이 무더기로 죽어나가도 웃긴걸 어떡하죠? 왜곡된 공간과 의외의 범인이란 점에서는 '관' 시리즈의 막내동생답군요. 이 작품 최대의 반전은 상권의 마지막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
5. 소감
이른바 '신본격'이라고 하는 일군의 소설들을 읽다보면,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수수께끼 풀이와 반전의 임팩트에 작가가 모든 힘을 쏟아 부었으니까요. 그러나 최근작인 "잘린머리 사이클"을 읽고 나니 경쾌한 문체와 참신한 트릭에도 불구하고, 그런 즐거움도 지나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람이 마구 죽어나가는게 싫어서는 아닙니다. ("잘린머리 사이클"에서 죽는 사람은 생각보다 아주 적어요. - 이것도 천기누설) 무엇보다, 바깥 사회와는 담 쌓은 장소에서 보통 사람은 상대도 못할 천재들이 상식과는 수만광년 떨어진 행동을 하고 있다는 설정은, 조금 동화스럽군요. 독심술과 예지력까지 버젓이 인정되는 추리소설에서, 힘없는 독자는 설정을 받아들이고 참여를 포기할까요, 아니면 작가의 공정함을 믿고 뿌려진 힌트를 머리 싸매고 주워담아 볼까요?
결국, 좋은 추리소설이란 무엇일까요? 그게 궁금해서라도 남들이 재밌다는 추리소설은 다 읽어 보렵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강추!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만날 때까지.
'일상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전(反轉)만을 기다리는 독서는 이제 그만... <살육에 이르는 병> (3) | 2007.03.12 |
---|---|
재미있는, 그러나 읽기 어려운 소설 - 미국의 송어낚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1) | 2007.01.26 |
새해 첫 주, 책에 파묻혀 (0) | 2007.01.09 |
내가 만화를 좋아하는 이유 (1) | 2006.08.27 |
라이드백을 타고 남쪽으로 튀자! (0) | 2006.08.27 |
알라딘에서, 코믹스톰에서, 그리고 코믹114(중고만화책)에서...
일단 재밌게 읽은 책은,
[albook|small|left|895274781X|]점성술 살인사건
흥미진진하고 엽기적인 일본 추리소설입니다. 워낙에 유명한 작품이다 보니 '트릭이 너무 많이 알려진 추리소설'이라는 얘기가 있다는데요, 저 역시 읽고 들은 게 많아서인지 대충 감이 잡히더라구요.
가장 중요한 트릭이 소년탐정 김전일에서 아예 그대로 나왔다면서요? 제가 기억하는 것은 가볍게 다뤘던 Q.E.D., 탐정학원Q에서였고, "이야기 파라독스"에는 자세히 소개되지요. 더 이상은 침묵. (아내가 지금 읽고 있는 중이라서...)
1980년에 출판되어 신본격의 시초라고 일컬어진다는데, 제가 읽은 신본격이라고 해봤자 십각관, 시계관, 그리고 "모든 것이 F가 된다" 정도라... (아, 만화로 나온 "월관의 살인"도 있다!) 어쨌든 기대했던 만큼 - '모든' 사건과 단서들이 결말과 트릭의 풀이를 향해 정교하게 짜인 구조물 - 은 아니지만 충분히 재밌습니다. 다만 탐정이 좀 불친절하네요.
[albook|small|right|8991643159|]뿌리 깊은 나무 1,2권
한국형 팩션이랄까요. 겉모습은 그렇습니다. 띠지에 나온 대로 "장미의 이름"과 "다빈치 코드"를 벤치마킹한 듯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대신 가상의 책 "고군통서", 다빈치의 그림 대신 한글을 대입하면 세종대왕 시대의 궁궐을 배경으로 이런 이야기가 나오겠죠. 그렇지만!
제가 보기에 이런 해석은 그야말로 '낚인' 겁니다. 이 책은 아주 정치적이에요. (XX일보가 이 책을 추천한다는 건 기자가 책을 읽지도 않았다는 얘기.) 배달 글자를 만들어 놓고 엉뚱하게 '훈민정音'이라고 이름지을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왕조가 끝날 때까지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인쇄하여 발간할 수 없었던 세종대왕의 고민을 이 소설은 깊이 있게 다루고 있거든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류의 소설과는 비교 불가!)
물론 역사적 사실(=실록)에 허구를 상당히 가미했다는 점은 이해해야죠. (책 말미에 연보를 달아주는 배려도...) 그런데 한글에 대해서라면 역사 미스테리물이 수십권은 쏟아질 수 있는 이야기거리가 있는데 우리 나라 소설가들이 지금까지 좀 무관심했던 것도 같고... 그것도 고조선, 조선, 나라잃은 시대를 걸쳐서 말이죠. 이 소설을 읽고, 려증동 선생님의 "배달글자"와 "배달겨레 문화사"를 다시 보고 있습니다. 중세 한국어 연구를 처음으로 시작했다는 [wp.ja]小倉進平[/wp](오구라 신페이)가 경성제대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만간 제가 훈민정음 조작 사건 시말의 네티즌 판을 만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 기사: 오마이뉴스, "왜 우리 글자를 <훈민정음>이라고 했을까"
앞에 소개한 책과 너무 판이한데요? ^^; 일본 전국시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닌자이자 가신이었던 핫토리 한조 이야기입니다. 완전 성인물! 원래 한 권에 정가 4500원이던 걸 중고로 500원씩에 샀으니 대박!이라 생각했지만 12권으로 완결이 아니었다니... 아무튼 아저씨들이 왜 "大望"(="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열광하는지 조금 알겠습니다.
12권에서 이야기는 미카타카하라 전투(도쿠가와가 신겐에게 개박살...) 직전에 끝이 납니다. (나머지는 인터넷 검색으로 공부해라? - 일본역사 이야기) 그 유명한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스타일을 조금 맛볼 수 있겠습니다. 이 만화를 보고 나니 "나루토"가 완전히 왜색이란걸 잘 알 수 있군요. 일본의 역사물이 한국의 청소년/성인들에게 세대를 넘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이해도 됩니다. 성리학 이론에 따른 당쟁과 카리스마와 힘에 따른 전쟁, 어느 쪽이 재미있겠습니까? (이야기거리가 되겠습니까?) 퇴계와 율곡이 理와 氣가 아닌 검과 활로 싸우면 어땠을까나...
'일상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미있는, 그러나 읽기 어려운 소설 - 미국의 송어낚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1) | 2007.01.26 |
---|---|
내맘대로 일본 추리소설 리뷰 2 (1) | 2007.01.23 |
내가 만화를 좋아하는 이유 (1) | 2006.08.27 |
라이드백을 타고 남쪽으로 튀자! (0) | 2006.08.27 |
전쟁과 삶 - 무거운 주제의 감동적인 만화책 몇 권 (1) | 2006.03.21 |
어릴적 만화가게에서 빌려 봤던 즐거운 모험의 기억이 아직도 두근거린다.
동대문 총판 골목을 어슬렁거리던 대학시절, 몇 년간의 직장생활, 그리고 대학원까지, 내 성인의 시간은 이사할 때마다 골칫거리가 되는 만화책과 함께였다.
방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백권의 만화... 버리고 잃어버린 책들까지 모두 헤아리면 천 권, 이백 종은 충분히 넘겠다. 그만큼 읽었으면 이제 뭔가 밖으로 나올만한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가까운 주변 사람들에게만 부끄럽게 공개하던 서가에 바람을 불러오고 싶다.
90% 이상은 번역된 일본 만화다. 내 취향이 그렇다. 80% 이상이 비현실적인 배경의 얘기다. 내가 좋아하는 SF 만화란 현실과는 이중으로 격리된 세상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거기서 얘기되는 과장된 현실에 상처받고, 감동한다. "Blame!"의 구조물은 도시의 어지러운 거리, "총몽"의 자렘은 지배계급에 대한 동경, "프라네테스"의 목성 탐사선은 세상과 타협한 우리의 꿈이다. 내가 사는 곳은 "카페알파"의 세상처럼 저물어가는 듯 잔잔하기도 하다가, "에덴"의 그것처럼 냉정하고 잔인하기도 하다.
누군가 얘기했듯이, 그런 것은 상상의 문제이다. 하지만 백지 위의 상상은 아니다. '놀라운 상상'은 더할 나위 없이 숨막히는 현실의 가장 뾰족한 그 곳에서 시작한다. 현재와 과거에 대한 알레고리는 무조건 손가락질 받을 것이 아니다. 설사 지금 우리 곁의 인물과 사건이라 해도, 상상이 되고 만화로 그려질 수 있다. 그러나 판에 박힌 모든 것은 패러디의 즐거움은 줄지언정, 새로운 길을 만들고 목표를 그려줄 수는 없다. 좋은 만화는 언제나 무엇인가 이야기한다. 작가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인물들이, 배경이, 예상치 못했던 사건의 전개가, 나를 깨운다.
대체 이 세상에서 만화책이라도 읽지 않고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지.
'일상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맘대로 일본 추리소설 리뷰 2 (1) | 2007.01.23 |
---|---|
새해 첫 주, 책에 파묻혀 (0) | 2007.01.09 |
라이드백을 타고 남쪽으로 튀자! (0) | 2006.08.27 |
전쟁과 삶 - 무거운 주제의 감동적인 만화책 몇 권 (1) | 2006.03.21 |
보노보노 (3) | 2005.09.30 |
남쪽으로 튀어! 1,2 (원제: Southbound, 2005), 오쿠다 히데오, 은행나무, 2006.
애니메이트 동호회 이야기 게시판에서 신중관님의 글을 읽고 “라이드백”을 5권까지 샀습니다. 남편 닮아 역시 책을 잘 지르는 아내는, 서점에서 “남쪽으로 튀어!” 두 권을 한꺼번에 들고 왔습니다. (지금 1권 값에 2권까지 껴 주네요.) 우연히도 두 책은 통하는 게 있습니다. “라이드백”은 2020년 일본의 학생운동을 배경으로, “남쪽”은 과거 급진 좌익에 몸담았던 부부가 만들어가는 오늘날의 일본 가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SF라고는 하나, “라이드백”은 분명 일본의 60년대를 그리고 있으니, 둘 모두 지금은 추억할 거리도 안되는 ‘과거’에 조금은 기대고 있는 셈이죠.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은 이제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albook|small-jpg|right|8956601615|]“라이드백”의 배경이야 누가 보더라도 60년대 일본 안보투쟁의 알레고리이고, (무단 링크 - 일본의 운동) 작가 역시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작가 왈, “RIDE BACK - 이야기에 등장하는 머신 호칭 외에도 다른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2020년까지 라이드백이라는 바이크 머신의 개발과 상용화에 걸린 시간이 필요했겠죠. 그럴듯한 메카닉도 없이 대놓고 구닥다리 얘기를 꺼내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어쨌든 미래 같지 않은 미래에서 어쩌다(!) 라이드백에 올라탄 소녀 오가타 린은 학생운동의 표상icon이 됩니다. 놀라운 행동 능력에 대중적 인기까지 더해져 그녀는 각 정치세력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죠. 이용당하거나, 제거되거나. 하지만 그녀는 모든 것을 떠나 자신의 의지로 라이드백을 타고 집회 현장을 누빕니다. 걷고 달리고 점프하는 그녀의 Fuego(불)는 말 그대로 불타는 열정이군요.
“남쪽”의 주인공은 화자인 아들 “지로”이지만, 부모님과 아이들(누나, 지로, 여동생)이 각각 이야기의 두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는 “아시아 혁명 공산주의자 동맹” - 줄여서 革共同, 무시무시한데요. - 에서 60년대 말까지 활동하다가 탈퇴한 아나키스트이고, 공권력, 세무서, 학교 등 국가기관과 사사건건 충돌하는데다 옛 정을 생각해서 협력한 과거 조직에게도 배신을 당합니다. 아주 제대로 사회 부적응이죠. 자식들도 나이에 맞춰 험하게 살기는 매한가지고, 어머니는 누구 편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과거는, 뻔하긴 하지만 누나의 비밀과 더불어 일종의 수수께끼 장치로 독자의 흥미를 끕니다. 아버지란 인물은 대체 얼마나 대단한 좌익 활동가였을까요? (방수차에 미군 팬텀기까지…) 어머니가 칼로 사람을 찌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들 가족은 과연 조용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어쩔 수 없이 구석으로 내몰려 제목대로 남쪽으로 튀기는 합니다만 남쪽이라고 만만하지는 않겠죠.
두 이야기의 구체적인 사건들은 책을 직접 보고 확인하시고, “라이드백”은 연재 중이라서 결말을 종잡을 수도 없답니다. 그래도 저 나름의 감상과 앞서 약속한 공통점은 정리를 해야죠.
라이드백 소녀 오카타 린이나 전설적인 활동가 우에하라 이치로가 멋있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운동에 환멸을 느꼈거나, 우익에 몸담고 있거나, 아무튼 ‘열혈’이 아님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해방구인 대학의 뒷문에서 배신당하고 체포되는 린, 튀어 간 남쪽에서 또 도망쳐야 하는 우에하라 부부의 모습은 행복한 삶과는 삼만 광년 떨어져 있습니다. (혹자 왈, 우에하라 이치로는 아동학대를 저지르고 있다는군요.) 그것도 동료에게, 조직에게 배신을 당한 채 홀로라니 학생운동이든 독립운동이든 운동을 하면 삼대가 고생한다는게 허튼 얘기는 아닌가 봅니다. 그래도 “남쪽”의 결말은 나름대로 해피엔딩이니 너무 우울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영웅이 자신의 조직에 배신을 당하고 고난을 겪는 스토리야 흔합니다. 주인공이라면 응당 고난을 극복하고 큰 뜻을 펴겠지요. 하지만 현실에서도 늘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결국 혼자니까요. “남쪽”의 지로네 가족은 남쪽에서 이웃들의 도움을 많이 받지만, 그들의 투쟁에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세계여행을 한다는 캐나다 출신 백수 한 명입니다. 자치회의 아이콘 역시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는 초라한 개인으로 돌아가 끌려다닐 뿐입니다 (아직까지는). 그래서 지로의 아버지는 이렇게 얘기하나 봅니다.
“지로,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중략)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아버지는 그중 한 사람이다. 알겠냐?”
세상은 뭔가를 해보기엔 너무 단단하지만, 꿈꾸는 걸 포기하기엔 아직도 정이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좋은 세상을 그리고, 뜻이 맞는 사람들을 찾으려고 애쓰나 봅니다. (노마진 풍으로) 하지만! 결국은 혼자서 싸워야 한다는 것, 그것도 끝까지 싸우지 않으면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조금은 슬프지만 뭐 어떻습니까. 다들 각자의 인생을 사는 건데. 별 대단치도 않은 조직간의 갈등에 사람을 죽이고 구호를 외쳐야만 하는 아빠의 친구 아저씨도 있는 거고, 자치회의 소모품으로 라이드백 소녀의 대역이 되어 경찰의 한 방에 저세상 가버린 철없는 학생도 있으니까요.
사람이 죽어나가는 집회 현장을 자신의 무대로 삼아 - 한때 잘나가는 댄서였거든요 - 학생운동의 아이콘으로 데뷔하는 린과, 법이고 소유고 다 무시하며 불쌍한 시골 순경을 자본가의 앞잡이라고 호통치는 아버지가 저에게 전하는 공통의 메시지는, 네 생각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개인의 사상이야 어린 시절에 형성되는 것이지만, 혼자 결정하고 행동할 만큼 컸다면, 국가가, 학교가, 군대가, 회사가 주입시킨 말도 안되는 주장은 치워두고 - 그런거 주입 받은 적 없다고 불끈하실 분들은 그냥 그대로 살면 됩니다 -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실천하는 것이 주인공의 삶입니다. 린이 Fuego에 올라탄 건 우연이었지만, 시위대의 중심에 선 건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로는 어쩌다 이상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지만, 가족의 집을 지키기 위해 꼴보기도 싫던 아빠와 함께 투쟁하며 어린 아나키스트가 되어갑니다. 운동이 무너지고 타락하고 희화화된 시대에 가장 위력적이고 파괴적인, 끝까지 저항하는 주체는 결국 나 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나도 주사파?) 지로에게 고독을 두려워 말라는 아빠의 당부는, 어째 너무 현실적으로 들립니다.
이 두 책의 이야기는, 무대 위로 날아오를 라이드백도 없고 튄다는 명목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남쪽도 없는 보통 사람들을 좌절시키는 그런 스토리가 아닙니다. 땅 주인과 맞서는 “남쪽”은 말할 것도 없고 - 제가 전세금을 날려먹은 적이 있어 더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 , “라이드백” 5권까지의 진행이 전반적으로 암울하긴 하지만 이 작가는 “공상과학 에디슨”에서 맛만 보여준, SF적인 비전을 가졌으니까요. 하긴, 제가 이런 글을 써서 올리는 것만 봐도 이 책들은 뭔가 힘을 주는 게 분명히 있습니다.
P.S.
“남쪽”의 말미에서 지로 어머니가 떠나기 전, 딸에게 감동적인 한 마디를 남깁니다.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다, 속이지 않는다, 질투하지 않는다, 위세부리지 않는다, 악에 가담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나름대로 지키며 살아왔어. 단 한 가지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 있다면 그저 이 세상과 맞지 않았던 것뿐이잖니?”
“그게 가장 큰 문제 아냐?”
아줌마, 큰딸은 이미 다 컸다구요.
'일상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해 첫 주, 책에 파묻혀 (0) | 2007.01.09 |
---|---|
내가 만화를 좋아하는 이유 (1) | 2006.08.27 |
전쟁과 삶 - 무거운 주제의 감동적인 만화책 몇 권 (1) | 2006.03.21 |
보노보노 (3) | 2005.09.30 |
상상의 세계 Imagined Worlds (1) | 2005.09.29 |
대학 다닐 때, 하숙집 옆방 책장에서 꺼내 읽었던 책. 그 충격은 컸지만 시간이 흘러 '대단한 책'이란 기억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마음이 내켜 결국 샀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유태인 부모님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전쟁이 끝나고 다시 만나기까지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는 아들. 모든 것을 생생히 증언하는 아버지는 그러나 영웅도, 비극의 주인공도 아니다. 단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가 살고 있는 평화로운 일상을 흔들어 놓는다. 친구, 가족, 믿음, 사랑...
"그 애들을 방 안에다 먹을 것도 없이 일주일만 가둬놓으면…… 그 땐 친구란 게 뭔지 알게 될 거다.…"[albook|small-gif|right|8989501059|width="100" height="152"]
전쟁(같은 환경)은 이런 것들을 가르쳐준다.
2. 팔레스타인
"쥐"와 함께 구입해서 앞부분만 읽고 일단 접어뒀다. 팔레스타인을 취재하는 미국 기자의 이야기이다. 불행히도, 역사는 (희극적으로) 되풀이되고, 사람들은 똑같은 것을 전쟁에서 배워야한다. 조금 지나면 이 책도 구하기 힘들어질 듯.
[albook|small|left|8990781396|width="100" height="145"]3. 페르세폴리스 1 -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
그러나 아이들은 전쟁 속에서도 자라고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되기 전에 전쟁터에서 죽기도 한다.) 이란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무남독녀 '마르지' 역시 이란 혁명과 이란-이라크 전쟁을 겪으며 성장한다. 훌륭한 부모님과 친척들 사이에서 그녀가 가꿀 수 있었던 가장 큰 덕목은 풍자와 해학 - 이 만화책의 힘 - 이 아닐까.
우리가 잘 모르던 이란의 근현대사가 녹아 있는 이 가족의 이야기에는 곰곰히 생각할 거리가 많다. 우리 나라의 민주화, 미국이 말하는 '악의 축', 이슬람 종교와 정치...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르지의 이야기가 재미있으며, 그녀는 놀랍도록 매력적인 소녀란 점이다. 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나는 이 글을 쓴다.
[albook|small|right|8970753494|width="100" height="142"]4. 저녁뜸의 거리
"일본은 원자폭탄의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이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갖는지는 동아시아 사람들이라면 다 안다. 그러나 히로시마에 살던 이 가족에게 원폭은 현실이었고, 오랜 시간 - 다음 세대까지 -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 일본인들로부터도 보이지 않게 차별당하는 그들의 삶처럼, 전쟁은 인간과 사회의 숨기고 싶은 밑바닥을 헤집어 놓는다.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은 과거를 미화하지만, 전쟁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albook|small|left|8970592539|width="100" height="143"]5. 재일교포 2.5세 '노란구미'의 한국.일본 이야기
앞에 소개한 책들과는 다소 동떨어진 느낌의 밝고 명랑한 만화책이다. 귀여운 작가의 캐릭터는 말 그대로 재일교포 2.5세. 한국인 어머니는 교포 2세 아버지와 결혼해 작가를 낳았다.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성장한 그녀가 한국으로 유학을 오면서 한국이란 나라,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일본을 다시 알아가는 과정이 에피소드로 엮여 있다. 개성있는 여러 인물들 중 최고는 역시 어머니! IMF를 겪는 한국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에 코끝이 찡해지면서 '우리 나라'라는 것이 교포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다시 생각해본다. 작가의 재미난 웹사이트 http://www.koomi.net/에는 다른 단편들도 많이 실려있다.
그런데 이 책이 왜 여기 껴 있냐고? 한국과 일본의 오랜 전쟁, 그리고 이어진 한국전쟁이 지금의 재일교포를 낳았다면 대답이 될까.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를 인터뷰하며 "쥐"를 그렸듯이 구미는 한국을 겪으며 그녀의 역사를 그리고 있다.
참고:
책을 읽은 순서는 (1),5,4,3,1,2
책을 구입한 순서는 5,4,3,[1,2]
'일상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만화를 좋아하는 이유 (1) | 2006.08.27 |
---|---|
라이드백을 타고 남쪽으로 튀자! (0) | 2006.08.27 |
보노보노 (3) | 2005.09.30 |
상상의 세계 Imagined Worlds (1) | 2005.09.29 |
내가 읽은 일본 추리소설 (3) | 2005.09.08 |
보노보노 1권 표지에 나오는 보노보노 부자
1권 중에서 에피소드(?) 하나
보노보노 머그컵 (must-have item)
'일상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이드백을 타고 남쪽으로 튀자! (0) | 2006.08.27 |
---|---|
전쟁과 삶 - 무거운 주제의 감동적인 만화책 몇 권 (1) | 2006.03.21 |
상상의 세계 Imagined Worlds (1) | 2005.09.29 |
내가 읽은 일본 추리소설 (3) | 2005.09.08 |
서울 다녀오면서 서점에 들러... (2) | 2004.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