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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0. 9. 15:48
오늘(10월9일)은 한글날이다.

1. 한글은 언제 만들었을까?

어떻게 10월9일이 한글날이 되었을까?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 있는 한글날의 유래를 보면 그 복잡한 경위를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서 그 사연을 짚어본다.

세종 25년(1443년) 12월30일 /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세종 28년(1446년) 9월29일 /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 어제와 예조 판서 정인지의 서문
이달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이루어졌다. 어제(御製)에,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생략)"
라고 하였다. 예조 판서 정인지(鄭麟趾)의 서문에,
"천지(天地)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생략)"
하였다.

이 두 기록이 문제의 근원이었다. 처음에 학자들은 3년 동안 수정보완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짐작하고 음력 9월29일을 양력으로 환산, 10월29일을 한글날로 정했다. 그러나 이후 연구에서 《훈민정음》은 책을 일컫는다는 점이 밝혀졌고, 세종28년의 기사는 책의 원고가 완성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본이 발견되었다. 거기의 정인지 서문에서는 '9월 상순'으로 적고 있었기에, 하순에서 상순으로 20일을 앞당겨 지금의 10월9일이 한글날로 정해진 것이다.

어쨌거나 훈민정음은 세종25년 섣달 그믐날 처음으로 세상에 나타났다.

2. 한글은 누가 만들었을까?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세종과 집현전 학자(학사)들의 역할에 대해서는 숱한 오해가 많았다. 일반인들의 생각은 대개, "세종 혼자서 훈민정음을 만들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세종이 큰 그림을 그리긴 했어도 실무는 신하들에게 시키지 않았겠느냐는 이런 통념은 아마도 현대 조직사회의 생리를 반영하고 있으리라. 그러나 다시 실록을 살펴보자.

세종 26년(1444년) 2월16일 / 집현전 교리 최항·부교리 박팽년 등에게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하다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최항(崔恒)·부교리 박팽년(朴彭年), 부수찬(副修撰) 신숙주(申叔舟)·이선로(李善老)·이개(李塏), 돈녕부 주부(敦寧府注簿) 강희안(姜希顔) 등에게 명하여 의사청(議事廳)에 나아가 언문(諺文)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고, 동궁(東宮)과 진안 대군(晉安大君) 이유(李瑈)·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모두가 성품이 예단(睿斷)하므로 상(賞)을 거듭 내려 주고 공억(供億)하는 것을 넉넉하고 후하게 하였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그 다음해 2월의 일이다. 세종은 집현전에 훈민정음을 공부해서 한자로 된 책을 번역하도록 시켰다. 상까지 내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집현전의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세종 26년(1444년) 2월20일 /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뢰다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최만리(崔萬理)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엎디어 보옵건대, 언문(諺文)을 제작하신 것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전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되는 것이 있사와 감히 간곡한 정성을 펴서 삼가 뒤에 열거하오니 엎디어 성재(聖栽)하시옵기를 바랍니다.
1.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遵行)하였는데, (생략)"
......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내가 너희들을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소(疏) 안에 한두 가지 말을 물으려 하였던 것인데, 너희들이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변하여 대답하니, 너희들의 죄는 벗기 어렵다."
......

단 나흘만의 반응이었다! 12명의 집현전 학사들 중 7명이 올린 이 상소문은 훈민정음 따위 필요 없다는 집현전의 '공식 답변'이었다 (당시 대제학이 없었음). 어떤 신하도 찬성하고 돕지 않았다. 세종이 얼마나 좌절했을지 상상이 간다. 나는 이 상소문과, 이어지는 세종과의 문답을 반드시 훈민정음과 함께 고등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훈민정음이 어떤 반대를 무릅쓰고 태어났는지를 알리기 위해. 한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기 위해.

아직도 정인지, 성삼문 등의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창제에 큰 역할을 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의도에서 그러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성삼문은 세종28년에, 정인지는 세종30년 쯤에야 집현전 학사가 되었다는 점이다. (《훈민정음》의 서문을 쓸 때, 정인지는 예조판서였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옛 글자를 참고하고 가족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

검색해보니 정조 7년 홍양호란 사람의 상소문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우리 세종 대왕께서 하늘이 낸 예지(睿智)로 혼자서 신기(神機)를 운용(運用)하여 창조(創造)하신 훈민정음(訓民正音)
세종대왕은 배달말을 말하고 한글을 쓰는 이상 존경할 수밖에 없는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