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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1. 8. 01:16
[일상/잡담]
어떻게 보면 별 상관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생각을 하나로 묶어 본다.
1. 고액권 초상인물 선정에 대해
돈이 미술작품인가? 미술계 인사에게만 자문? - 한글로
위 글에 따르면, 2007년 10월17일 한국은행이 밝힌 고액권 화폐도안자문위원 구성은 다음과 같다.
한국은행 직원 (3명): 발권국장, 발권국 부국장, 발권정책팀장
한국조폐공사 직원 (2명): 디자인조각팀장, 위조방지센터 부장
미술대학교수 (5명): 미술사 1명, 시각디자인(색채학, 타이포그라피 등) 4명
"고액권 초상인물 선정과정 석연찮다" - 동아일보, 2007.11.7
그러나 오늘 동아일보 기사에 나온 구성은 다르다.
민간 자문위원 8명 중 4명과 접촉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사이에 자문위원을 다시 구성했든지 이전 정보공개를 거짓으로 한 것이 된다. (처음 구성은 사실 문제가 많았다.) 그리고 자문위원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었는지도 의문스러웠다고 한다.한국은행 (2명): 이승일 부총재, 발권국장
역사학자 (3명)
분야별 위원 (5명): 철학·사상사, 미술사, 과학사, 문학, 그래픽디자인 분야
상당수 자문위원은 독립운동가로서 안창호와 김구의 공적을 모두 인정하면서도 초상인물로는 안창호가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중략) 한은은 "명단을 밝히면 위원들의 자유로운 의견개진을 방해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위원들의 면면을 비공개로 했다.
어떤 높으신 분이 신권 초상인물로 김구와 신사임당을 그렇게 밀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개인적으로 신사임당 선정의 근거와 배경을 이해할 수 없다.
여성 또는 과학자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인물 선정이 시작되면서부터 나왔는데, 과학자 하면 장영실이 쉽게 떠오르지만 여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뉘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어떤 세력(집단, 조직...)이 신사임당을 적극 추천했을까? 일단 대표적 여성단체들은 아니다(한국여성단체연합 성명 참고). 출신지인 강릉 지역과 주부클럽연합회라는 단체가 지지했다는데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천안 지역과 여성단체연합이 지지하는 류관순과 굳이 비교할 필요도 없다.
한국은행이 밝힌 선정 이유가 가정과 교육의 중요성이라는데, 어떻게 그게 여성만의 일이며, 신사임당이라는 인물로 대표될 수 있단 말인가? (출세한 자식 덕인) 후대의 미화를 벗기고 신사임당의 행적을 보면, 적어도 가정과 교육이란 가치와는 별 상관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끼워 맞추기는...
2. <정조 이산>을 보며: 노론과 친일파가 추구했던 것
그런데, 악역을 맡고 있는 노론의 이상(理想)은 (그런 것이 있다면) 과연 무엇이었을까? 왕마저도 부정할 수 있었던 그들의 이념은 어떤 것이었길래 조선 후기를 통해 지속적으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사실 이런 주제는 전문적인 분야에 속하지만 나름 두 가지 사례를 들어 대답을 찾아본다.
친일파가 된 노론:
영원한 주류, 그 오만과 편견 - 이덕일, 한겨레21, 2001.2.21
조선의 멸망은 비극이었지만 더 큰 비극은 주류 노론이 국망(國亡)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노론은 아무도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았으며, 오히려 일제에 협력해 지배층의 지위를 온존했다. 일제는 조선을 점령한 직후인 1910년 10월 후작 여섯명, 백작 세명, 자작 스물명, 남작 마흔다섯명 등 총일흔여섯명에 달하는 인물들에게 이른바 ‘합방 공로작(功勞爵)’을 수여했는데 대부분 노론이었다. 일제가 자의적으로 수여한 남작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받은 수작(授爵)의 영광에 감읍했다.
독립운동을 거부한 노론:
[한국철학의 고향을 찾아서] 위정척사파와 춘천-양평-부안 - 동아일보, 2002.7.14
나라잃은 시대, 3.1운동에 참여하지 못했던 유림들은 독자적으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파리장서운동을 계획한다. 곽종석과 김창숙 등이 주도한 이 운동에 이이와 송시열, 곧 노론의 학통을 이어받은 호남 유림의 영수 전우(田愚)는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500년의 종사보다는 3000년의 '도통'을 지키겠다는 이유로.그러나 간재 전우(艮齋 田愚 1841∼1922)의 간재학파는 현실 참여보다는 외롭게 도를 지키는 길을 택했다. 전우는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제자들을 이끌고 전북 부안 계화도로 들어가 다시는 뭍을 밟지 않았다. 도를 실현할 수 없을 만큼 시절이 혼란할 때 은둔해 도를 지키며 훗날을 기약하는 것은 공자와 맹자도 택한 길이었지만, 의병에 가담하라는 제의도, 파리장서에 서명하라는 제의도 거부했던 그는 나라의 위태로움을 돌보지 않는 ‘썩은 유자(腐儒)’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노론이 지키려고 했던 성리학의 도통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덕분에 조선 말의 백성들은 세도정치에 수탈당하고 결국 나라마저 잃고 만다. 결국 노론이 친일파로 변신하고 독립운동을 거부하며 지켜낸 것은 자신들의 지위와 재산이었다. 사상은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법이다.
과거와 현재: 우리 시대의 노론
나라를 일제에 팔아먹은 노론은 아직도 우리 사회, 특히 역사학과 문화예술계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권력을 쥐고 주류로 남아 있다. 솔직히 나는 이번 신권 초상인물 선정에도 이들의 영향이 있었을 거라 짐작한다. 정권이 여러번 바뀌었지만 친일파 청산은 더욱 어려워지고, 이들의 이데올로기와 영향력 역시 결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우리 나라의 권력을 쥐고 주류를 자처하면서,
국가의 위기(예를 들자면 IMF 사태)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당면한 개혁(예를 들자면 삼성 비자금 수사)을 거부하는 세력을
나는 '우리 시대의 노론'이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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