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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리스'에 해당되는 글 1건
2008. 7. 21. 00:31
게으른 SF 팬인 나에게 누군가 인상 깊은 작품 한 구절을 읊으라면 잠시 생각한 뒤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솔라리스
“그러나 나는 놀랄 만한 기적의 시대는 영원히 과거의 것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을 아직도 굳게 믿고 있다.” – 스타니스와프 렘, <솔라리스>, 마지막 문장, 샘기획 옮김, 1992년 청담사판.

멋있지 않나요? 몇 주 전 이 작가의 작품들이 새롭게 출간되었다는 소식에 <사이버리아드>를 지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어서 대표작인 <솔라리스>도 나왔더라구요. 오멜라스에서 정성들여 만든 책(‘초판 한정 양장본’)인지라 턱없이 비싼 값에도 불평할 수 없었답니다. 그리고 오늘, 소설의 맨 뒷장부터 펼쳤죠. 유명한 번역자님의 손을 거친 그 구절을 다시 만나려고요.

솔라리스 오멜라스판
“그러나 나는 잔혹한 기적의 시대가 영원히 과거의 것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다.” – 김상훈 옮김, 2008년 오멜라스판.

‘놀랄 만한 (경이로운?) 기적의 시대’가 ‘잔혹한 기적의 시대’로 변해버렸습니다. 번역 원본인 영어판에는 ‘cruel miracle’이라고 적혀 있나 봅니다. 알아보니 1992년의 번역 원본은 러시아어판을 번역한 일어판이었다는군요. 아, 스타니스와프 렘은 ‘폴란드’ 작가입니다. 어쨌든 제대로 된 이 번역본으로 인해 철없는 대학생이 맘대로 상상하고 십수년간 간직해왔던 그 멋있는 문장의 의미는 오해 혹은 비약이었을 가능성이 커졌다고나 할까요.

내가 가진 청담사판 책 바닥에 찍힌 도장의 숫자들을 보면, 이 책을 산 건 1993년 12월31일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이제는 색이 바랜 옛날 책이지만 이사할 때마다 버리지 않고 챙기면서 여러 번 읽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소설을 잘 이해한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오해나 안하면 다행이지요. 한편으로 위안도 삼아봅니다. <솔라리스>를 폴란드어로 읽을 독자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냐고, 영어판이든 일어판이든 영어-한국어판이든 러일한판이든 그게 그거 아니냐고 말입니다.

작품의 주제는 널리 알려져 있고 작가 역시 솔직히 얘기했더군요. “나는 실제로 존재하지만 인간의 개념이나 이미지나 사고로 환원될 수 없는 것과 인간이 조우했을 때의 상황을 묘사하고 싶었을 뿐이다.” 다시 읽다보니 번역된 외국어 문학을 감상하는 내 처지 같기도 하고, 요즘같이 누군가/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어려운 시대에 대한 예언으로 읽히기도 하니 나의 오독은 부끄러움을 모르나 봅니다.

여담이지만, 타르코프스키의 동명 영화는 보다가 잠들었습니다.

(오래 전에 쓴 글, "SF를 읽고싶다."가 생각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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