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독서

숙명처럼 간직해온 비밀 - <숙명>, 히가시노 게이고

느린시간 2007. 5. 31. 21:37

[albook|small|right|8979197667|]숙명宿命, [wp.ja:東野圭吾]히가시노 게이고[/wp], 1990

(네이버 일본 미스터리 문학 즐기기 카페에 쓴 글)

추리소설의 가장 큰 덕목 중 하나인 '의외성'을 살리기 위해 작가들은 고심합니다. 그리고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소설, <숙명>에서 기발한 트릭이 아니라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된 비밀을 통해 자신만의 의외성을 만들어 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운명

사건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그 인과관계를 흐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안개 속으로 거슬러가야 합니다. 이런 일에는 동기가 필요하죠. 주인공에게는 어렸을 적 자신과 친했던 여인의 죽음, 알 수 없는 이유로 형사였던 아버지가 그 수사를 중단해버린 일, '끈'에 이끌린 듯한 첫사랑의 인생 궤도, 형사와 용의자로 다시 만나게 되는 학창시절의 맞수 같은 강력한 운명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20년 이상의 시간이 마련해 놓은 이 무대에서 그가 발견하는 진실은, 사람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 곧 숙명이었습니다.

이 소설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여인의 죽음이 아련한 추억처럼 그려진 서장을 읽고 나면, 독자는 느닷없이 한 기업 사장의 임종을 마주하게 됩니다. 물론 읽다보면 모든게 다 엮이지만요. 다만, 본격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나기까지 너무 뜸을 들인다는 느낌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 작가의 장점 중 하나가 간결한 이야기 진행이라 좀 민감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유족들의 불안한 가족관계가 묘사됩니다. 그 와중에 다른 가문 출신의 후임 사장이 살해당하고, 과거의 첫사랑과 결혼한 라이벌을 만나게 된 주인공은 수사를 구실삼아 자신만의 동기에서 숨겨진 진실 속으로 파고듭니다. 읽고나서 보니 이런 모습은 오이디푸스 왕을 비롯한 비극의 주인공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네요. <숙명>의 주인공은 어떤 진실을 마주하게 될까요?

오래 지속되는 반전

매체를 가리지않고 남발되는 '반전' 탓에 독자들의 요구 수준이 많이 높아졌습니다. 이 소설의 결말에서 드러나는 진실 - 반전 - 은 제 경험에서 비교해보자면, <벚꽃지는 계절에...>나 <살육에 이르는 병>처럼 책을 처음부터 다시 펴들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구성상의 트릭이 아니니까요. 대신, 공감하기 힘들었던 인물의 행동 하나하나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저의 경우, 이런 느낌은 책을 덮고 나서 한참동안 내용을 되새겨볼 때 비로소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 소설의 반전은 큰 파도보다는 잔잔한 파문에 가깝습니다.

굳이 얘기하자면 이 소설의 핵심적인 반전은 딱 네 단어로 줄일 수 있습니다. 이것 자체는 꽤 놀랍습니다만 재미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라면 그 이상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서 추억, 사랑, 좌절, 충격, 속죄, 결심 같은 것들이 주인공들의 행동에 극적 긴장감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알리바이 조작과 흉기의 비밀, 그리고 작가의 후속작들에서 계속해서 다뤄질 '뇌'의 모티브가 무대 장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겠죠.

히가시노 게이고는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작가입니다. 이번엔 제가 먼저 읽어버렸는데, 아내에게 이 소설은 (영화로 본)<비밀>, <호숫가 살인사건>, <용의자X의 헌신>만큼 재미있을까요? 간결한 묘사와 결말의 반전이란 그만의 스타일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의미를 둘 수도 있겠지만 부족한 부분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점이 이 소설을 즐기는 데 큰 어려움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작가가 심리 묘사에 약하다는 말도 있지만, 타인의 마음을 어느 누가 환히 들여다 볼 수 있겠습니까? 급박한 반전으로 끝나는 이야기일수록 독자에게 더 많은 몫이 주어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소설 마지막 줄의 한 단어에 주목해 봅니다. '어떤 것'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작가의 스타일

'숙명의 라이벌'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숙명'이란 단어를 함부로 쓰지 못할 것입니다. 누군가 말했듯이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의 가장 큰 스포일러는 제목입니다. (거기다 표지까지...)

P.S. 하룻밤만에 다 읽고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작가의 팬이라면 꼭 읽어볼 작품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