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잡담

글과 사람 - 권정생 선생님

느린시간 2009. 5. 23. 05:52
이 글은 지난 주말, 권정생 선생님이 사셨던 안동에 다녀와 남긴 사진들의 후기이다.

사람이 쓴 글은 얼마만큼 그 사람을 드러내고 있을까?

아름답고 감동적인 글을 읽으면 그 글을 쓴 작가에 대한 존경심이 생긴다.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담긴, 좋은 글로 넘쳐나는 그 무엇을 동경해서다. 훌륭한 추리소설을 읽고 나면 작가의 머리 속이 궁금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기대는 대개 들어맞는 편인데, 그건 글과 사람, 두 가지 모두에서 가치를 갖는 작가들이 시장에서 인기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그러나 평범한 독자가 알 수 있는 작가들의 사람 됨됨이란 결국 매체를 통한 것이고 왜곡을 거칠 수밖에 없는 법이니 속 편하게 글을 텍스트 그 자체로 대하는 자세도 일리가 있다. 책으로 나온 글은 적어도 사람만큼 완전히 뒤바뀌지는 않으니까.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더 알 수 없는 것은 그것의 변화다. 작가에게나 독자에게나. 사람이 글의 후광이 되는 것은 출판사의 마케팅으로 많이 익숙하지만 사람이 잊혀지면 글도 수명을 다한다. 사람에 대한 실망으로 글이 달리 보이는 일도 가끔 겪는다. "이완용이 글씨 하나는 잘 썼다."고 감히 얘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요컨대 글은, 예술은 그 사람 삶의 부분으로 의미가 있다는 것이 상식이다.

내가 <몽실언니>와 <강아지똥>을 감명깊게 읽은 것은 권선생님의 삶을 알기 전이다. 한참 뒤에야 나는 그분의 삶에 대해 알게 되었다. '역시 그랬구나'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사랑과 희생의 메시지는 작가가 고결한 자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보류되어야 한다면, 작가 뿐 아니라 독자도 피곤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권정생 선생님은 후배 동화작가들에게 너무 큰 짐을 지우셨다.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스스로를 속이며 하는 거짓말은 그 자신도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거짓말을 구별해낼 자신이 없다. 나는 글에서 그 사람의 진심을 읽을 자신이 없다. 그래서 작가의 삶으로 눈길이 간다. 그러나 그것도 남의 말이고 다른 이의 시선일 수 있다. 그리고 동시대의 사람에 대해 시간이란 담금질은 기다리기 어려운 과정이다.

당신에게는 결코 다행스런 일이 아니었겠지만 일직교회 목사님의 말씀처럼 권정생 선생님의 삶은 시험의 연속이었다. 병과 가난, 외로움. 그리고 삶의 후반에 찾아온 명예와 돈의 힘까지. (나는 굳이 '유혹'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어쩌면 그것은 예수님이 받았던 시험과도 비슷하다. 어느 쪽이든 가능한 선택이지만 멀리 뒤돌아보는 이에게 답은 하나뿐인 그런 문제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분의 글은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던 작가를 만난 것이다.


"하나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 <강아지똥>

그리고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에 나오는 당신의 친구들, 기훈이, 태호, 갑덕이, 옥자, 성태, 청관이, 성난이...... 그 믿음은 작가의 진심일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