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잡담

고속버스 뒷자리에서 생각하는 정치 우화

느린시간 2007. 10. 19. 20:41
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속버스를 오래 타는 일이 잦았다. 그러면서 항상 불만이었던 것이 여름철에 겪게 되는 지나친 냉방이었다. 특히 뒷자리에 앉을 때면 선선함을 넘어 한겨울같은 냉기에 한여름 감기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랬을까?

기사와 뒷자리 손님
고속버스의 강력한 에어컨은 운전 기사가 켜고 끈다. 그런데 운전석은 뒷자리에 비해 햇볕이 잘 들고, 환기를 위해 열어둔 작은 창문도 있어서 더울 수밖에 없다. 그런 자리에서 '적당한' 실내 온도를 맞추려다보니 저 멀리 떨어진 뒷자리는 극지방이 돼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뒷자리 손님들은 덜덜 떨다가 참다못해 복도를 위험천만하게 걸어가서 기사에게 불만을 토로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잘 모르는 기사라면 손님의 하소연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저씨, 너무 추운데 에어컨 좀 꺼주세요."
"괜찮은데 왜 그래요?"

멀어지는 통로 - 선거와 여론
고속버스 실내 온도를 경제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에어컨을 켜고 끄는, 정책을 추진하는 사람들 - 정치인과 공무원 - 이 그 정책으로 인해 가장 큰 영향을 받는 뒷자리 손님들을 얼마나 고려할 수 있을까? 그러나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운전 기사와 뒷자리 손님의 이해관계는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 게다가 양자를 이어주는 선거와 여론이라는 통로는 우리 나라에서 지역주의와 보수 언론에 의해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선거법을 비판하는 블로거들의 움직임은 그것이 정치인과 국민들(특히, 다수의 하위 계층)을 오히려 더 멀어지게 만들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다.

뒷자리 손님들의 선택
비유를 계속하자면, 우리 사회라는 고속버스는 세계적인 추세를 따라 점점 길이가 늘어나고 있다 (양극화). 이제는 뒷자리 손님이 운전 기사에게 말을 걸기 위해 다가가기도 어렵다 (계급 고착). 뒷자리 손님이 추위에 떨지 않기 위한 가장 간단한 방법은 에어컨 스위치를 그리로 가져 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손님들은 버스를 뜯어고쳐야 하는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고려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앞쪽에 있는 빈 자리를 노린다.

더 좋은 버스는?
운전 기사가 에어컨 조작까지 신경써야 할 이유는 없다. 기술이 된다면 온도 센서를 뒷자리에 달고 적당한 온도가 유지되도록 하면 된다. 그러나 운전 기사와 앞자리에 앉은 손님들이 이런 변화를 달가와할까? "왜 뒷자리 손님들만 배려해야 하는가? 反기사 정서(?)때문에 운전을 못하겠다." 그러나 앞자리 손님들에게는 열 수 있는 창문이 있고 덮을 수 있는 담요가 있다. 정책의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쪽은, 개념 없는 기사를 만나서 가장 괴로운 쪽은 뒷자리 손님이다. 고속버스는 이렇게 나의 현실 감각을 일깨운다.